"아버지 묘를 찾으러 사할린에 왔습니다"
상태바
"아버지 묘를 찾으러 사할린에 왔습니다"
  • 사할린 새고려신문
  • 승인 2007.09.05 15: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연상씨 사할린 강제징용된 부친 행적 찾기에 나서
광복절 이튿날에 신문사(<새고려신문>)를 찾아온 손님들이 많았다. 사업으로 사할린에 나와 몇년동안 거주하는 한국 김성훈 사장의 안내로 본사를 찾은 나이가 지긋한 두분(모자)이 필자에게 자기들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제가 어디 가면 도움이 더 될까 하다가 어제 김사장님 집에서 우연히 새고려신문을 봤겄든요. 이 쪽으로 즉시 연락할까 하다가 김사장님이 '아예 신문사를 직접 가봅시다'고 해서 이리 왔는데…" 이렇게 유연상(64)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사할린에 강제징용되었던 아버지 유흥준씨(1922년생)의 묘를 찾으러 모친(라준금씨, 1925년생)을 모시고, 서울에서 사할린까지 왔다. 그러나 묘는 찾지 못했다. 유흥준씨는 전라북도에서 1945년 1월에 마지막 강제징용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그는 생이별한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독신자로서 살아왔다.

"아버님 소식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요?"란 필자의 질문에 유연상씨는 "1976년에 일본에 있는 사할린동포귀환촉진회 박노학씨를 통해서… 그 분이 일본에서 사할린동포들의 편지를 모아가지고 한국에 보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살던 주소로 엽서를 보냈어요…"라고 했다.

그 당시에 유연상씨는 어머님을 모시고 이미 서울에 살고 있었다. 엽서는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축영으로 왔었다. 동네우체부가 그 엽서를 받아보고, 그때 살던 사람들이 여기 안 살지만 이 사람들이 어디 가서 산다는 것을 알만한 집안들에 보낸 것이었다. 엽서가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계신 유연상씨를 찾아왔다. 그 엽서를 받아본 유연상씨는 대구 중소이산가족회(회장 이두훈)로 쫓아갔다.

사실 이 편지는 유흥준씨가 한국에 남아있는 동생 유흥수 앞으로 보낸 편지었다. "사할린의 형 유흥준은 가정의 염원 여지 덕택으로 31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독신자로 몸 건강히 잘 있다…" 고 서두를 뗀 그는 모친, 동생소식을 알아보고 자기 아들과 아내가 어디 있다는 걸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유흥준씨는 그 당시에 코르사코브 페르워마이스카야 거리 78A-2호에 살고 있었다.

약 30년동안 부친의 생사(마지막 편지 1948-49년에 왔음)를 모르는 유연상씨는 "답장을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하니, 대구 중소이산가족회에서 하는 말이 "편지를 써서 가져오면 여기에서 일본 촉진회에 보내고, 다음 일본에서 적십자사를 통해서 사할린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970년대 당시였다. 그때 그런 편지가 오가는데 두 달이 걸렸다.

"나는 서울에 살고 어머니도 재혼하지 않고 계신다는 답장을 보냈더니 아버님이 '아이구, 그러냐'면서 이번에 사진까지 한장 보내셨더라구요”사진도 된다 싶어서 유연상씨는 가족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러나 두번째 편지를 보낸 후 답장은 없었다. 유연상씨는 또다시 편지를 써 보냈다. 다시 두 달이 지나도 회신은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수차 보냈으나 무소식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사할린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다른 분이 써 보냈다.

"…자네의 부친 유흥준씨의 사망에 대하여 자세한 편지를 하였으나, 금번에 자네의 편지 사연을 보니 그 말을 다 어찌하겠는가… 자네 부친께서 1975년 신병으로 8개월동안 입원하시고 나와 직장에 일 좀 다니시다가 76년에 또 입원하셨다가 집에 와서 수개월 신고 하시다 77년 1월 4일 사망하시어 친우들 기관에서 출상은 잘 하였네. 자네 아버지는 사망될 줄 알고, 내한테 연상의 주소를 적어주며 원정도 하데…"

편지를 쓴 곽윤덕씨는 자기도 한국에 3남 1녀를 두고, 부친과 같이 1945년에 사할린에 왔는데 형제간 다름이 없다며 해마다 산소에 가서 메와 술도 올릴 것이고, 벌초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편지를 보고서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더니 진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편지를 받고 나서 유연상씨는 사할린에 대해서는 듣기도 싫어했다. 사할린뉴스도 일부러 안 들으려고 하고, 잊어버리려고 했다.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가졌으면 사실 아버님의 묘를 찾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유연상씨는 한숨을 쉬었다.

사할린동포들이 2000년에 한국에 영주귀국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유연상씨는 대한적십자사에서 귀국자 주소를 알아보고, 작년에 안산 고향마을 찾아갔다. 산소를 못 찾더라도 아버지가 생존에 어떻게 살다 돌아가셨는지 혹시나 아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편지랑, 사진이랑 들고 안산에 갔더니 안산복지관 그 당시 소장인 정천수씨가 일일이 호마다 전화 하면서 '혹시 유흥준씨를 아는 분이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소문이 나서 할아버지들이 모였었다.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유연상씨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잘 알지, 그 분이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지"라고 다들 그러셨다.

유연상씨는 되게 반가워했다. "혹시 아버지 산소를 찾을 수 있을까" 물었더니, "그거야, 오래전에 죽었다는 걸 알지, 어디에 묻었는지 모르지" 했다. 안산에서 유연상씨는 곽윤덕씨도 돌아가신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았다.

모인 어르신들 중 한 아주머니가 사진을 보더니 "이 분은 우리 남편하고 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아주 친했다"면서 자기 남편도 돌아가셨다고 했다. "자네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나?" 1977년 1월이라고 하니 자기 남편(유상태씨)은 그 해 7월 달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는 유연상씨의 아버지와 아주 친했는데 그 당시 병석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유흥준씨 초상에 못 갔다. 같은 해에 사망했으니 묘가 근처에 있을 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자기가 8월 15일에 사할린에 갈 것이니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따라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8월 9일 역방문한 윤미자(유상태 부인) 아주머니를 따라오게 되었다. 유연상씨는 어머니하고 광복절 전날 14일 사할린에 도착했다. 윤미자 아주머니와 연락하고, 15일 코르사코브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그 아주머니가 '이 근처를 한번 찾아보세요. 같은 해니까 묘를 전혀 엉뚱한데 쓰지는 않았을테니까…" 해서 그 근처를 찾아보았는데 그 날 또 비가 많이 오고 해서 마음 놓고 다니지 못했고… 실제로 '찾지 못한다'고 안산에서 늘 그러더라구요" 30년이 지났지. 자식들이 있으면, 묘를 관리하니까 그게 유지가 되지만…

30년동안 친구들이 그당시에 묻어주고 한두해 벌초도 했을지 모르지만 그 다음엔 누구도 보살피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찾을수 있겠는지… "묘는 없더라도 비석이라도 있을지 모른다고 헤매다 보니까, 정말 자손들이 없어서 돌보지 않은 묘는 거의 다 비는 돌로 된 것은 있고, 나무로 된 것은 썩어버렸고, 쇠로 된 비가 많더라구요. 그런 것들을 봤는데 글씨가 전혀 안 보이지… 그 것이 우리 아버지 묘일지도 모르는데도, 흔적이 없으니까…" 한국손님은 계속 이야기하였다.

유상연씨는 혹시나 아버지를 묻어준 친구 중 누군가 살아계실지 믿고 있고, 그의 마지막 희망은 행여나 곽윤덕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제분한테 친구묘를 가리키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으니 유상연씨는 마지막 희망을 잃지 않고 신문사 도움을 빌었다.

이런 사정을 얘기한 유연상씨는 "고맙습니다. 신문사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하고 가니깐 마음이 좀 수월해요"하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1세들이 화태로 강제로 끌려온지 60여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이 비극은 지금까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