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지역 한인신문 약사

2003-07-14     반뱡률

한말·일제강점기에는 국내에서의 신문이 사실상 일제식민당국의 탄압과 간섭을 받아 제대로의 언론활동을 펴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러시아지역의 한인언론은 미주지역의 한인신문과 함께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러시아지역의 한인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주요 한인신문들의 약사를 소개한다.         
        러시아지역 최초의 한인신문은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톡(해삼위) 구개척리에서 창간된 ƒ해조신문(海朝新聞)„인데, 같은 해 5월 26일까지 3개월간 일간으로 발간되었다. ƒ해조신문„의 실질적인 창립자는 당시 한인사회의 유력한 부호였던 최봉준(崔鳳俊)이었으며, 발행인과 편집인은 최봉준의 조카인 최만학(崔萬學, 최레프)와 러시아인 듀코프였다. 주필은 장지연(張志淵)이었는데, 창간 초기 장지연이 취임하기 전에는 정순만(鄭淳萬)이, 장지연의 사임후에는 이강(李剛)이 대리주필을 맡았다.
        ƒ해조신문„에 이어 ƒ대동공보(大東共報)„가 1908년 11월 18일 블라디보스톡 구개척리에서 창간되어 주2회 발행되었다. 창간 당시의 간부진을 보면 사장 차석보(車錫甫), 발행인겸 편집인 유진률(兪鎭律, 유가이 니콜라이)이었다. 이후 1909년 1월 31일 한인사회의 최고원로인 최재형(崔在亨)이 새로운 사장에 취임하여 1910년 5월 5일까지 활동했다. ƒ대동공보„의 주필은 이강이었으며, 정재관(鄭在寬)이 대리주필로 활약했다. 대동공보는 1910년 8월 18일 ƒ대동신보(大東新報)„로 제호를 개칭하기도 했으나, 한국을 강제적으로 병합한 일본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당국의 명령으로 1910년 9월 1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일제의 강점후에도 한인동포들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할 한인신문의 발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즉, 1910년초 지방파쟁의 여파로 정간 위기에 있었던 대동공보의 속간을 주도했던 청년들은 1911년초 근업회(勤業會)를 결성하고 러시아당국에 신문발간허가를 수차례 청원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이들은 러시아당국의 허가를 얻는데 성공하여 1911년 6월 18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ƒ대양보(大洋報)„를 발간하였다. 주2회 발간된 ƒ대양보„의 발행인은 대동공보의 발행인이었던 유진률이었으며 주필은 신채호(申采浩)였다. 얼마후 ƒ대양보„가 재정난에 부딪히게 되자, 근업회측은 이종호(李鍾浩)의 권업회(勸業會) 발기회측과 통합하고 운영권을 이종호에게 넘겼다. 그러나 ƒ대양보„는 근업회의 유진률과 이종호간의 대립의 와중에서 인쇄기가 도난되면서 사실상 정간되고 말았다.
        ƒ권업신문(勸業新聞)„은 ƒ대양보„를 계승하여 1912년 5월 5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발행되었다. ƒ권업신문„은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당국의 인가를 받아 창립된 최초의 한인자치기관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였다. ƒ권업신문„은 주1회 순한글로 발간되었는데, 주필은 신채호, 김하구(金河球), 이상설(李相卨), 윤해(尹海) 등이었다. ƒ권업신문„은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간행된 ƒ신한민보(新韓民報, 1905년 11월에 간행된 „공립신보ƒ의 계승지)„와 ƒ신한국보(新韓國報, 1907년 10월에 창간된 „합성신보ƒ의 계승지)„와 함께 1910년대 해외한인의 대표적인 항일언론으로 이름을 떨쳤다. ƒ권업신문„은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되어 1914년 8월 29일 126호를 마지막으로 9월초 러시아당국에 의하여 폐간될 때까지 2년 4개월간 간행되었다. ƒ권업신문„과 같은 시기에 자바이칼주의 치타에서는 월간잡지 ƒ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기관지로서 1912년 1월 2일 발간되어 1914년 6월까지 총11호 발간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후 언론자유가 허용되면서 두개의 한인신문, ƒ한인신보(韓人新報)„와 ƒ청구신보(靑邱新報)„이 발간되었다. ƒ한인신보„는 ƒ권업신문„을 계승하여 항일적 논조가 강했던 신문으로서 1917년 7월 8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주1회 발간되었다. 신한촌민회의 기관지였던 ƒ한인신보„의 발행인은 한용헌(韓容憲, 한안드레이 콘스탄지노비치)이었으며, 주필은 장기영(張基永), 김하구였다. ƒ한인신보„보다 3일 앞선 917년 7월 5일 니코리스크-우수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에서 창간되어 주1회 간행된 ƒ청구신보„는 러시아의 원호인(러시아국적취득자)들로 조직된 고려족중앙총회(高麗族中央總會)와 그 후신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의 기관지였다. ƒ청구신보„의 창간위원은 최봉준, 문창범(文昌範), 전보리스였으며, 주필은 조완구(趙宛九), 박은식(朴殷植), 윤해(尹海), 남공선(南公善) 등이었다. 1918년 여름 체코군 봉기이후 연합군이 체코를 승인하게 되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한족상설의회로 바뀌면서 청구신보 역시 ƒ한족공보(韓族公報)„로 개칭하였다.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의 무력개입으로 시베리아내전이 시작되어, 일본의 협력을 받은 백위파가 러시아극동지역을 석권하게 되면서 ƒ한인신보„와 ƒ한족공보„의 발간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전체 한인사회를 상대로 한 한인신문의 발간이 다시 개시된 것은 시베리아내전이 끝난 1923년의 일이다.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3·1운동 4주년을 기념하여 ƒ三月一日„이 창간되었는데, 발행기관은 ƒ삼월일일사„이었으며 주필은 이백초(李白初)였다. ƒ三月一日„은 주2회 발간할 예정으로 3호까지 발행되다가 4호부터 제호가 ƒ선봉(先鋒)„으로 바뀌었다. 발행기관 역시 ƒ전동맹공산당 해삼현(블라디보스톡현) 당간부고려부„로 바뀌었고, 발행장소도 블라디보스톡 시내로 옮겨 간행되었다. 1929년 4월 발행기관이 ƒ전동맹공산당 원동변강위원회와 직업동맹 원동변강쏘베트„로 바뀌면서 하바로브스크로 이전하였다가, 1933년 발행기관의 변동없이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전하여 1937년 9월 12일에 폐간될 때까지 발행되었다.
        ƒ선봉„은 1937년 강제이주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이전하여 사실상 폐간되었다. ƒ선봉„은 ƒ레닌의 기치„로 제호를 바꾸어 서재욱을 주필로 ƒ러시아공산당(볼쉐비키1938년 5월 15일 복간되었으며, 이후 50여년을 ƒ레닌기치ƒ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레닌기치ƒ는 1978년 알마튀로 이전하였는데, 고르바쵸프의 페레이스트로이카의 분위기에서 1991년초 ƒ고려일보„로 개칭되어 자유신문이 된 후 오늘날까지 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