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정치권진입 징검다리 아니다”

막사이사이상 수상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006-08-11     시민의신문=설동본 이재환 정영일 기자

행동ㆍ연대ㆍ탈경계가 시민운동 새지평 

“기분 나쁠 리야 있겠어요. 그런데 유쾌하지만도 않아요. 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간사들이 병나서
그만둘 정도로 열심히 일했는데… 뭔가 남의 공을 뺏은 것 같은 미안함이 듭니다.”
지난 4일 서울 안국동 방향 인사동 입구에 있는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만난 박원순 변호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손사래부터 쳤다.
실무자로 뭔가 일을 하고 있어야 성이 차는데 나이 들고 선배세대가 돼 조직의 얼굴 역할을 하다보니 상도 받고, 이래저래 ‘묶이는 것 같다’는 소회다.
주변 활동가들의 축하도 “지금은 애도를 보내야 할 때”라고 농반 대꾸했단다. ‘당대에 평가를 받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냐’는게 이유다. 이쯤 되면 도를 넘는 겸손이다. 박 변호사의 오늘을 만든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편집자주

<시민의신문>은 그의 수상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말보다 보름 정도 앞서 유력한 후보 물망에 오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재단에 문의한 결과 확정적인 답을 얻진 못했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설명하는 방향은 우선 구체적 실천을 염두해 둔 ‘action oriented'(행동 지향), 연대를 만들어가는 ’network oriented‘(연대 지향), 특정분야나 주제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를 목적에 둔 'cros sectional oriented'(탈경계 지향)이다.

“특히 일본에서 미국의 싱크탱크와는 다른 연구소 활동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네트워크를 만들고 뉴스레터 발송 등을 추진하는데 많은 참고가 됐죠. 일본시스템연구소라는 곳은 정부나 지자체 용역을 많이 수행한 30년 역사의 싱크탱크입니다. 향후 희망제작소와 연구원 교환, 자료 공유 등을 약속했습니다.” 연구 뿐 아니라 국가간 경계를 넘는 활동을 구상하고 있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재정이 마련되면 아시아리서치센터 같은 것을 만들려 합니다. 학계에서 아시아를 연구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론적이지 않습니까. 시민사회적 마인드를 가지고 하면 좀 더 특별한 활동을 벌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우선 순위에 좀 밀리네요.”

‘경청 과정’ 거치는 희망제작소

시민사회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희망제작소의 초기 우선순위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박 변호사는 ‘경청의 과정’으로 정리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듣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을 돌면서 이들과 네트워크하고 자료도 수집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이는 결국 배움의 과정이었죠.”

보다 구체적으로 그간 희망제작소의 활동을 지켜보면 창안센터, 세계도시 라이브러리 등의 사업과 함께 지방선거 직후 지자체 장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장학교’ 등 지방자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시장학교는 희망제작소의 초기 핵심 사업으로 주목받았다.

“시장학교를 통해 좋은 자치단체장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발전 모델을 구축할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함께 희망제작소 안에 작은 연구소들이 속속 만들어집니다. 지역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조례를 연구하는 조례연구소, 건강연구소, 공원연구소 등이 그것입니다. 큰 주제에 밀려 그동안 시민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작지만 의미 있는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이같은 지향을 통해 희망제작소가 기대하는 변화는 시민사회의 활성화다. 희망제작소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변화의 아이디어들을 정부, 정당은 물론 시민단체들이 써먹게 하겠다는 설명이다.

“참여연대도 싱크탱크의 기능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크고 중요한 부분에 집중해 연구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을 했죠. 희망제작소는 사회의제들을 굉장히 세밀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최근 실시한 임산부 지원 프로젝트가 사례가 되겠죠.”

큰 이슈에 집중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작은 변화를 위한 노력도 충분한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박 변호사에게 ‘희망제작소가 구체적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한 견해를 묻자 웃으며 답한다.

“지금 된 게 있으면 더 이상할 것 같은데요. 사회창안을 위한 풍성한 자료를 모으는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인선논란은 민주주의의 과정

“절 보고 히든카드라구요? 제가 정말 그런가요.”

정치권 진출에 대한 항간의 집요한 눈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언론에서 나오는 이같은 이야기에 대한 박 변호사의 평가는 “기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것 같다” 였다. 최근 보수진영의 제성호 중앙대 교수 그를 여권의 히든카드로 주목하며 ‘대선에 나가선 안되는 이유’를 주장한데 대해서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고 응수했다.

“희망제작소를 정치권 진입을 위한 징검다리라고 억측을 내놓더군요. 하지만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연구하는 전문가 집단을 만들어 놓고 정치진출 교두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정치 진출하려면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지요.”

박 변호사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세간에선 그의 정치입문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를 영입하려는 정치권의 제안은 85년 총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도 민정수석을 비롯한 각종 영입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는 지난 17대 총선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사실상 전국구 1번을 보장하는 공천심사위원장을 제안했다. 열린우리당은 자당 의원을 보내 영입에 공을 들였다. 이어 과거사위원회 위원장 자리 이야기도 나왔다. 그의 반응은 항상 완강한 거부였다.

그렇다면 각도를 달리 해 시민사회 차원에서 정치지도자를 육성하는 것은 어떤지 물었다.

“시민사회 리더가 정치지도자로 변신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시민사회가 거기에 직접 관여하면 큰 어려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참여연대 하면서 진보적 정책을 내놓았지만 진보정당과는 함께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정당의 당파성과 거리를 둬야 시민사회가 큰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백기완 선생이 대통령이 되도 시민단체는 비판자로 남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참여연대 시절 하곤 했다는 박 변호사는 만일 정치과 시민단체가 연결된다면 비극적 결과를 낳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사회가 비판과 견제, 견인을 할 순 있겠지만 함께 뭔가를 하자는 것은 반대합니다. 시민사회 정치세력화 이야기도 나오지만, 만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올해 대통령은 누굴 모시자’ 그럼 말이 되겠습니까.”

막사이사이상 (Magsaysay Award)이란?
 
1957년 비행기 사고로 급서한 필리핀의 전 대통령 R.막사이사이의 품격과 공적을 추모·기념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제적인 상으로서 1958년 3월 1일 록펠러 재단이 공여한 50만 달러를 기금으로 막사이사이 재단을 설립하여 해마다 정부 공무원, 공공사업, 국제협조 증진, 지역사회 지도, 언론문화 등 5개 부문에 걸쳐 각각 5만 달러의 상금과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1962년 장준하, 1963년 김활란, 1966년 김용기, 1975년 이태영, 1979년 장기려, 1986년 제정구·정일우, 1989년 김임순, 1996년 오웅진 신부, 2002년 법륜 스님, 2005년 시민운동가 윤혜란이 수상했다.

‘위기가 기회'라는 진리

그로선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시민운동 위기론에 대한 이야기다.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기는 여러 측면에서 조성된 것입니다. 우선 시대가 과거와 같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죠. 민주화 운동 시절에는 학생들이 목숨 걸고 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당장 절박하지는 않잖아요. 젊은 친구들이 좋은 직장에 관심을 갖고 시민사회는 돌아보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정권이 어수룩하고 독재 혹은 독재의 잔재가 남아있는 시절에는 할일도 많고 일하기도 쉬웠다는 박 변호사는 이제 정당이나 정부가 많은 것을 가져갔다고 토로했다. 시민사회의 의제가 많이 수용되긴 했지만 현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시민단체 활동이 100% 국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졌죠. 이전에는 곡괭이만 들면 얼마든지 팔게 나왔지만  이젠 채굴의 깊이가 ‘심부화’ 된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로 가고 있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시민운동이 발전했고, 시민사회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했기에 일어난 부메랑 효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가가 기회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단체도 현장으로, 지역으로 가고 다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를 맞았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 변신해야 합니다.”

진행= 설동본 기자 seol@ngotimes.net
정리= 정영일 이재환 기자 y2kljh@ngotimes.net
사진= 이정민 기자 jmlee@ngotimes.net

박원순은 누구?

56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김상진 열사 사건으로 제적됐다. 78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 방황 끝에 독학으로 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잠깐의 검사생활을 거쳐 83년 변호사를 개업한 이래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조영래 변호사 등 선배그룹과 함께 인권변호사 생활을 했다. 91년부터 이듬해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후 96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2002년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고 새로운 운동영역을 발전시켜 갔다.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저서로는 ‘성공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한국의 시민운동,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NGO,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국가보안법 연구’(전 3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