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미국 LA의 동포언론사들을 찾아서

2005-05-02     김제완기자

하루 발행 지면  100쪽 넘어

코리아나뉴스 정채환발행인

지난 2003년 11월에 열린 제1회 재외동포기자대회중에 참가자들이 잊을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대회의 하일라이트였던 청와대 방문을 앞두고 세종로 코리아나호텔의 버스를 타는 순간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27명의 동포기자들중에 한명의 청와대 출입이 거부된 것이다.

미국에서 함께 온 일행들이 술렁거렸다. 이때 행사주최측인 한국기자협회 이상기회장은 진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양해를 구해 파국을 피해나갔다. 이사건은 이회장이 지난 1월 펴낸 '요즘 한국기자들'이라는 제목의 책에도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이때의 당사자가 코리아나뉴스 www. koreananews.com 정채환 발행인이다. 그는 DJ의 임기중에 그의 삼남인 김홍걸씨의 호화주택구입 문제를 집중보도해 당시 정권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런 기사에 분을 풀지 못했던 당시 청와대 비서관 윤아무개씨의 제지로 인해 김대중대통령 면담에서 제외된 것이다.

기자가 윌셔가 3130번지에 위치한 코리아뉴스의 사무실을 방문했을때도 이당시 사건이 화제로 올랐다. 정사장은 그때 청와대구경은 못했지만 자신의 특종을 국내외 기자들에게 홍보해주었다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일정소득도 없는 홍걸씨가 "언덕 위의 하얀집"같은 호화주택에서 사는 것이 동포사회에 큰 위화감을 조성했다면 취재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집부근에 DJ의 측근인 조풍언씨가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는 심증을 잡고 취재했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코오롱그룹 이동찬회장의 친자소송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시카고에 거주하는 이동구씨가 미국법정에 친자확인소송을 낸 것을 계기로 집중취재해 많은 관심을 얻었다.

60이 가까운 나이에도 정발행인은 지금도 매주 7꼭지 정도의 기사를 직접 작성한다. 특히 한국정치에 대한 그의 칼럼은 미주신문인협회 회원사들이 가져다 쓰기도 해서 미전역에 그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칼럼의 논조가 너무 보수적인 입장에 머물러있는 게 아닌가고 묻자, 정발행인은 단지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 것이지 이념적인 잣대로 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선한 이에게 깃이 되고, 악한 이에겐 매가 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붓"이 코리아나뉴스의 사시이다.

 

한국정부에 쌓인 불만 토로

피플뉴스 민병용발행인

 

민병용 피플뉴스 발행인은 지금도 '민국장’으로 불린다. 지난 80년대부터 미주한국일보 편집국장을 두차례에 걸쳐 6년이나 재임했기 때문이다. 이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민국장’은 월간으로 피플뉴스를 발행하는 본업보다도 미주한인인명사전 편찬과 이민역사박물관 건립에 더 큰 열정을 보이고 있다. 미주동포판 Who's Who라고 할 수 있는 '미주의한인들-미주한인인명사전'은 수년간의 작업 끝에 5월중순 서울에서 인쇄된다. 민국장이 직접 원고를 들고 올 예정이다. 

이 사전에 수록된 인원은 모두 2300명으로 이중 남가주만 1000명에 이른다. 이외에 북가주 180명, 뉴욕 178명, 워싱턴DC 149명, 시카고 112명, 하와이 63명등이다. 이외에 주요 공직자 60명 언론인 10명도 수록됐다.

이름 사진과 함께 경력 서훈사항등 객관적인 자료들이 소개돼 있다. 주류사회 진출자, 비즈니스에서 성공한 사업가, 한인사회 봉사한 사람들, 통일운동에 헌신한 사람, 변호사 회계사 예술인 등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수록됐다. 책이 나온 뒤에는 인터넷에도 이 자료를 올릴 예정이다.

그가 추진하는 또다른 사업인 미주한인이민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다음 선거에서 제임스한 현 LA시장을 지원하고 있다. 그가 당선되면 박물관 부지를 내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민국장의 30년 이민생활은 미주동포신문사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69년 말에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문교부 유학시험을 통과해 73년 8월 미국에 도착해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던 74년 10월 미주한국일보가 창간되면서 기자의 길로 복귀한다.

본사출신의 기자가 이곳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니 장재구 회장의 호출을 피할수 없었다. 장회장은 일년만 와서 도와주고 다시 공부하라고 했다.  미주한국일보에서 그는 불과 수개월만에 차장이 되고 또 부장으로 고속승진한다. 그뒤 78년부터 2년간 첫번째 편집국장을 역임한다.   TV 방송국장 논설위원등을 거친 뒤에 88년 두번째 편집국장을 맡는다.

민국장이 재임했던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한국일보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난 5년사이에 중앙일보가 급속히 영향력을 키워서 대등하게 따라왔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99년 5월 민국장은 캐나다한국일보 사장직을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그는 퇴직후에도 천직인 기자생활을 계속해나간다. 99년 12월 위클리신문 '피플뉴스'를 창간해 1년동안 펴냈다. 그뒤 미주이민 1백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동안 피플뉴스는 휴간됬다. 그후 지난해 11월 월간으로 복간했다. 피플뉴스지의 내용은 제목을 통해 짐작할수 있다. 전지면을 인물 소개에 바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