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아래 펼쳐지는 꼬레사람의 고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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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아래 펼쳐지는 꼬레사람의 고본질
  • 장준희
  • 승인 2003.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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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아래 펼쳐지는 꼬레사람의 고본질

올해 우리나이로 서른 한살인 육(陸) 에직은 벌써 5년째 이곳 러시아 남부 '알타이스끼 끄라이 바르나울' 지역에서 농사질을 하고 있다. 두 남동생과 삼촌, 어머니까지 합세한 가족농(家族農)이다. 지난 3월말부터 일을 시작해 수박, 오이를 재배해 팔고 있다. 사실, 4월말 나머지 가족들이 오기 전에 진작에 이곳 바르나울 지역으로 와 가족들이 와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했다. 지금은 한창 수박과 오이를 수확해 내다 팔고 있다. 지난봄에 딸을 출산한 아내마저 일손을 거들겠다며 땡볕아래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돕고 있다. 지난겨울 동안에는 시르다르야까지 가서 메기니 잉어니 하는 강 물고기를 사 지굴리 뒷 트렁크에 가뜩이나 실어다 타쉬켄트 시내 바자르에 팔기도 했었다.

아무리 시베리아가 가깝고 러시아가 가깝다고 하더라도 여름은 여름이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아래 펼쳐지는 꼬레사람 에직의 '고본질'은 힘겹기만 하다. 적어도 9월말까지는 이렇게 고본질에 종사하며, 고향인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생활하는 반복적인 계절적 일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부모님대(代)에서 시작된 고본질이 에직에게까지 대물림된 것은 아직까지 고본질이 변화된 독립국가연합의 국민인 꼬레사람 에직에게 가장 돈되는 일거리이기 때문이다. 전문직 마저 버리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고본질이 갖는 매력은 제일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꼬레사람들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 남부, 카프카즈 북부 일대에 이르기까지 구소련 전역 중 농업 가능한 전지역에서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계절적 이동농업인 고본질을 행하고 있다.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중앙아시아의 꼬레사람들은 지금 출타 중이다.

1937년 가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강제이주 당했다는 역사적 사건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한인사회는 강제이주에 의해 새롭게 조성되어 발전해 왔다. 모국인 한국사회와는 특별한 접촉이나 교류 없이 구소련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차단되어 정체된 생활방식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존 적응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특히, 중앙아시아 한인들이 채택했던 경제적 방식은 농경민족 한인의 우수성을 여과 없이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구소련의 체제에 부적절한 한인의 전통이나 민족언어(고려말)는 점차 약화 내지 사라져 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농경민족의 후예답게 중앙아시아에 강제적으로 정착한 한인들은 농업에 종사하게 된다. 한인들이 중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종래 벼농사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북방 한계선을 한층 끌어 올려놓았다. 한인들은 한때 구소련 벼 수확량의 3분의 1을 담당하기까지 했으며, 구소련 전체 양파 소비량의 70%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는 한인들의 우수한 농경기술과 성실 근면한 민족성(ethnicity)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 구소련 여러 민족들에게 한인은 민족적 색채가 뚜렷하지 않은 민족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며, 민족언어였던 고려말 마저 사어(死語)의 과정을 밝게 되었다. 한인들 스스로도 종교(신앙) 없는 소수민족으로, 고려말보다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민족성(民族性)이나 민족정체성(ethnic identity)과는 괴리된 삶을 살아가야 했다. 민족보다는 가족과 개개인의 안위와 안정이 무엇보다 우선 시 되던 시절이었다. 한인들이 그 동안 겪었던 강제이주와 적성민족으로서의 고난과 역경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일들이 구소련 한인사회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민족적 정체성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더 강했던 구소련 한인들이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강력한 생산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농경민족으로서 교육열 높고, 부지런하고 머리 좋은 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던 한인들이 사회주의 국가였던 구소련에서 취했던 생산방식이 오늘날 여타 민족에 비해 경제적 안정과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바로 계절적 이동농업방식인 "고본질"이다. 고본질은 1960년대 들어 꼬레사람들이 집단농장인 꼴호즈를 대거 떠나면서 이농(離農)과 더불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은 중앙아시아란 투르크계 이슬람 유목 문화로 대표되는 문화적 토양 속에서 한인들이 농경민족으로서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사회주의에 철저히 적응한 결과였다.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 한인사회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강제이주 이후 구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한결같이 정체된 삶을 살아오다가, 일시에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면서 민주주의, 자본주의라는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처했다. 이제 그 변화의 기운도 십 년이 지나면서 꼬레사람 본연의 민족적 생활양식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꼬레사람이란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경주해 오고 있다. 다행히 한국사회와의 빈번한 교류는 꼬레사람들이 만들어 가야할 민족 공동체의 좋은 지표가 되고 있다. 그것은 꼬레사람만의 전통을 하루 빨리 활성화시켜 중앙아시아란 민족환경에 새롭게 해석하여 적용시켜 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소멸과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꼬레사람들이 유독 유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던 기제는 경제적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찍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나름대로 터득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소신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한인들이 고본질을 통해 경제적으로 자신들의 삶의 지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는 꼬레사람들의 끈끈한 근면성과 노력이 보인다.

나는 이 시점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국인들을 주목한다. 꼬레사람들이 중앙아시아에 농업기술을 전파(傳播)하면서 자신들의 전공이자 전문인 농업을 마음껏 펼치며 경제적 부과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가운데, 지금 우즈베키스탄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국인들은 또 다른 형태의 고본질을 위해 대규모, 대량생산 방식을 채택한 현대식 농업에 서서히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꼬레사람의 고본질과 진배 다를바없는 한국인들의 농업은 우즈베키스탄이란 자연환경과 농업환경에 적절히 대응해 가며 한국을 주요 수요시장으로 삼아 농산물 품종 다각화 작업에 착수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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