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신문 돌리던 길따라 지금은 명함을 돌리죠"(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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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신문 돌리던 길따라 지금은 명함을 돌리죠"(최종)
  • 홍제표
  • 승인 2003.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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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었을까? 안 그래도 바쁜 여당 중진의원의 하루는 그날따라 잠깐의 숨돌릴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7월11일 유재건(65) 의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오전7시 정각 집을 나서 국회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베테랑 정치인답지 않게 왠지 긴장돼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예. 실은 오후에 중요한 토론회 사회를 맡기로 했습니다. TV토론 사회를 그렇게 오래해 봤는데도 항상 긴장되네요"
'중요한 토론회'는 민주당내 신당추진기구가 마련한 범국민 토론회였다. 유 의원은 김원기, 이해찬, 이재정, 허운나 의원 등과 함께 신당추진 핵심세력으로, 이로 인해 당 안팎으로부터 공격을 받고있다.
"신당은 분당이 아닙니다. 오늘 토론회도 그런 방향으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어요" 신당은 당을 깨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꽤나 곤욕스러웠던듯 묻지도 않은 말을 되풀이했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화제를 돌렸다.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주시죠. 의원님 홈페이지를 보면 어릴 때 고생이 많았다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허허. 그래 보입니까. 사실 유복한 집안출신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궁해 보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유 의원의 유년시절은 현재 지역구와 공간적으로 일치한다. 지금 사는 곳도 생가에서 멀지않다. 1937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출생, 돈암 초등학교와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25때 잠시 피난간 것을 제외하면 줄곧 돈암동에서 성장했다.  
"무학자이신 홀어머니 슬하에 외아들로 자라 늘 가난했죠. 그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신문도 돌리고 찹쌀떡 행상도 하고, 그러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바짓단을 걷어올려 장딴지 근육을 보여준다. "이게 나이 육십 넘은 노인네 다리 같소?" 자랑삼아 힘을 잔뜩 주기는 했지만 나이에 걸맞지않게 건강함이 넘쳤다.
"어머니가 떡을 만들면 내가 그걸 들고나가 팔아오고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죠. 이 언덕배기를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내렸습니다. 나이 좀 먹는다고 부실해질 다리가 아닙니다" 인생은 묘한 것이다. 당시 신문을 돌리던 길을 따라 지금은 의원 명함을 돌리고 있다. "초년 고생 사서한다는 말을 무능한 사람들의 자기변명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누구든 뜻을 올바로 세우고 진실되게 추구하면 반드시 얻게되는 법입니다"
사실 그 말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 같았다. 그 날 일어날 크고작은 정치적 사건들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기독교인인 유 의원은 여느 때처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30분동안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이날 묵상의 주제는 이사야서 41장 10절의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리라. 내가 너의 오른 손을 들어주리라"라는 구절이었다. 유 의원은 "실망이 클 때, 계획한 일이 잘 안될 때,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고 싶었던 사건은 이날 아침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유 의원은 오전 8시부터 의원회관 제2별실에서 비공개로 열린 신당추진기구 운영위원회 조찬모임에 참석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소 경직된 분위기에서 오후 토론회 점검과 함께 잠시 후 열릴 의원총회와 본회의 대책 등을 논의했다고 장영일(32) 보좌관이 전했다. 호남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의 경우 '신당=분당'이란 오해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있다는 말도 나왔다.
유 의원은 회의에 앞서 의사당 1층 로비에 있는 해공 신익희의 동상을 찾아 함께 사진찍기를 청했다. 장 보좌관은 "신당이 신익희 선생으로부터 비롯된 민주당의 맥을 잇는 정통 민주정당임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아니겠나"고 귀띔했다.
장 보좌관의 '의원님 자랑'은 계속됐다. "우리 의원님은 젠틀한 성격입니다. 공군장교 출신이라 그런지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아무튼 무척 신사적입니다. 보좌관이 일하기 편한 분이죠. 함께 일하다보면 국회의원이 아니라 아버지나 큰삼촌 정도로 느껴질 때도 있어요"
실제로 오전 9시20분부터 시작된 자신의 홈페이지 개편 회의는 격의없는 농담이 오가며 시종 화기애애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무슨 얘긴가 도중 유 의원이 또 자신의 장딴지 자랑을 하자 양선모(40) 보좌관이 "장딴지 사진만 따로 한 장 찍으시죠" 하는 격이다.
홈페이지 작업을 위해 초빙된 인터넷 전문가는 '흐르는 강물을 닮은 정치인'이란 홈페이지 중심문구는 "다소 추상적이고 약한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그러나 "20세기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이 먹혔지만 지금은 문화와 지성을 가진 정치인이 감동과 변화를 가져온다"고 반론했다.
그러더니 다소 엉뚱한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하긴 정치인이 너무 유하기만 한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야. 가끔은 큰 소리도 좀 쳐야겠다고 싶어요" 그러면서 얼마 전 지역구 행사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소개했다.
내용은 이렇다. 호남출신 유력인사의 사촌쯤 된다는 한 젊은이가 유 의원 옆에 앉아 담배연기를 연신 유 의원의 얼굴에다 뿜어대며 "전라도 표 얻어서 국회의원 된 것 아니냐. 그런데 왜 신당 만들어서 배신하려 하느냐"고 말했다. 유 의원은 그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같은 질문은 계속 이어졌고 참다못한 유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생전 목소리 높이는 것을 본 적 없던 보좌진과 지역주민들이 깜짝 놀랐다. "사실 화도 났지만 그런 예의없는 사람한테는 일부러 따끔하게 혼쭐을 낼 필요가 있어" 보좌진들에 대한 사후 설명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대화가 무르익어가는 순간 의사당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굿모닝시티 현금수수 의혹을 받고있던 정대철 당 대표가 관련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유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 대표에 대한 사퇴압력이 더욱 강해질테고, 그렇게 되면 신당추진 과정에도 큰 부담이 된다. 보좌진들도 이 사건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유 의원은 급히 의사당으로 향했다. 제241회 국회 제3차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취재진이 이미 몰려들어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정 대표 행보 등에 대해 물었다. 여당 의원들은 대부분 말을 아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의원총회에서부터 여당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오후 12시30분. 회의가 2시간동안 정회됐다. 덤덤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온 유 의원은 의원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캄보디아 대사 임기를 마치고 얼마 전 귀국한 이원형 본부대사와의 점심약속이 30분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반갑게 마주한 두 사람은 메뉴로 나온 곰탕을 뜨는 둥 마는 둥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로 외교활동에 관한 것이었다.
외교는 그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통일외교통상 위원회 소속으로 민주당 국제협력특위 위원장 등 주로 외교분야를 담당해왔다. 유 의원만큼 의원외교 활동에 적극적인 의원도 별로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한 달에 한 번은 외국방문 스케줄이 잡힙니다. 외국 정부나 국제기구, 단체에서 초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장 보좌관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임종석, 송영길 의원 등 젊은 386의원들의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일도 잦아졌다. 앞으로는 정부의 공식외교 못지않게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비공식 외교도 중요하다. 그 때문인지 젊은 의원들 중에는 접었던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열성파가 적지않다는 후문이다.
"국제협력특위 위원장 자격으로 중국 공산당의 초청을 받아 가보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더군요. 공산당 국제부 인력은 수백명이나 되는데 우리 당은 몇 명 안되요. 중국과의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중국의 외교가 강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듣고있던 이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식사 후 다시 본회의에 참석했던 유 의원은 오후 4시로 예정된 범국민 토론회 참석을 위해 30분 일찍 빠져나왔다. 토론회 최종 준비점검을 해야한다. 단 1,2분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하루였다. 이러다간 날이 새도록 같이 있어봐야 몇 마디 나눌 수나 있을까... 조바심에 이 때다 하고 한마디 던졌다.
"의원님은 외국생활을 오래 한 동포출신 정치인인데, 동포들의 참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겠군요. 결론부터 말하면 당연히 참정권을 줘야죠" 일단 질문을 접수하니 미안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한다.
"외국시민권을 가진 동포는 몰라도, 적어도 한국국적을 가진 교민들에 대해서는 지도자를 뽑을 기회를 줘야합니다. 피선거권은 당장 어렵겠지만 적어도 대통령 선거에서만큼은 투표할 수 있게 해줘야지요. 기본적인 권리는 부여해야 조국에 대한 관심도 높이고 동북아 중심도 되고,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 "옛날 군사정권 시절에 월남 파병군인들에게 부재자투표 시켰더니 전부 여당표만 나와서 야당에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잖습니까? 어느 수준 이상 되는 나라들은 다 참정권 주고있습니다"
오후 4시. 아침부터 유 의원의 신경이 가있던 범국민 토론회가 시작됐다. 의원회관 1층 599석의 대 회의실이 꽉 들어차고도 모자라 통로까지 메워졌다. 생각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들이 높았다. 혹시 동원된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지구당에서 동원하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그렇더라도 옛날처럼 금품을 뿌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장 보좌관이 정색을 하며 "대부분 열성 당원들이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 사회자'로 소개를 받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유 의원은 다변에 달변이다. 거기에다 나이가 무색하게 목소리까지 미성이었다. 왕년의 명성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토론진행은 그의 또 다른 주특기다. 20여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지난 90년 귀국한 이후 5년동안 KBS와 MBC에서 시사토론을 진행했다. "TV토론을 하면서 1,160명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게 저의 최대 자산입니다" 토론은 그가 정치적 양식을 얻고 전국적인 인지도까지 확보해 정치에 입문할 수 있게 해준 토양인 셈이다.
오후 6시15분 토론회가 끝났다. 유 의원의 표정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것도 잠시일 뿐 얼마 지나지않아 좋지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민주당 의원들이 한나라당의 단독 표결처리를 막기위해 국회의장실 앞에서 농성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의사당 앞에서는 수행비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새벽에나 귀가하겠네"하는 푸념도 들려왔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이 정치이던가? 다행히 여야간 합의가 이뤄져 안건을 다음 회기로 넘기기로 하고 해산했다(하지만 며칠 뒤 야당 단독으로 통과됐다). 유 의원도 드디어 쉴 틈을 찾았다. 농성 때문에 취소된 지역당원 만찬행사에 다시 갈 것이냐를 놓고 구수회의가 잠깐 벌어졌지만 참석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란 결론이 내려졌다. 오후 8시 긴 여름 해도 거의 넘어갈 즈음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오늘 말씀도 많이 하셨는데" 사실 토론과 사회가 특기인 유 의원도 오후가 되자 목소리에서부터 피로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허허. 사실 오늘 말할 기회가 좀 많았죠. 하지만 이게 다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다음날 새벽에는 또 눈이 번쩍 떠집니다.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나 하고 말입니다" (28.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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