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고려인사회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이 대거 강제이주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고려인사회는 1991년 소연방의 붕괴와 카자흐스탄의 독립을 기점으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립 이전까지는, 그리고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은 고려인을 포함,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의 의식 속에 '소련인' 즉, 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공동체적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함께 거주하는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가고 있다는 의식이 자리해 감에 따라 과거에 공통된 정체성을 가졌던 인근 나라 재소 고려인들과는 조금씩 다른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다.
1999년 현재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99,665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9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은 강제이주세대 후손들이지만 일부는 1960-70년대에 사할린에서 건너왔다. 50년대 북한유학생으로서 귀국을 거부하고 남은 사람들도 극히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후자의 두 집단은 비록 수는 적지만 모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고갈되어가던 모국어신문사 '레닌기치'(고려일보의 전신)의 기자와 고려극장의 극작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민족문화 계승에 이바지했고 한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는 통역으로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안정되고 수준 높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는 정부의 관대한 소수민족정책과 최근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강제이주 와중에도 살아남아 고려인의 말과 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던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고려일보를 통해 다수의 문인들을 배출함으로써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재생산할 수 있었고 고려극장을 통해 풍부한 모국어 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카자흐스탄 130여 민족 중에서 위구르민족과 더불어 모국어신문과 모국어로 공연하는 극장을 갖고 있는 유일한 소수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강제이주세대 선배들은 척박한 중앙아시아 땅에 버려졌을 때 집보다 학교를 먼저 지었다. 그래서 한 세대가 흐른 뒤에는 사회 전반에 다수의 고려인 인텔리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1999년 현재 고려인 대졸자 비율은 1천명당 262명(알마타시 1000명당 400명)으로 130여 민족 중 유대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교육열은 개인적 성공을 보장해준 반면 민족공동체를 약화시켰다. 주류사회에 편입하려는 열망은 러시아문화에 대한 예속도를 높여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곳곳에서 민족성 상실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고려일보는 모국어로 글을 쓸 후계자가 없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부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이하 카고협)의 활동이다. 1989년 조직된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중앙을 전신으로 하는 카고협은 고려인을 대표해 정부를 상대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정, 관, 재계에서 성공한 고려인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카고협은 출범 당시 알마타에 개원되었던 한국교육원과 협력, 카자흐스탄 전역에 모국어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현재는 '고려인회관 건립'과 '젊은 인재양성'을 위해 집중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관건립은 아직 요원하지만 인재양성은 결실을 봐 올 5월에 카고협산하 고려인청년회주최로 첫 국제청년포럼이 개최되었다. 또 알마타고려민족문화중앙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근원으로부터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으면 정체되어 없어져 버리고 마는 고인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정체성은 한국인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유지, 재구성되는 측면이 있으며 사실 최근 10년 동안의 고려인 역사는 한국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인들이 한국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여름 알마타에 한국교육원이 개원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알마타대학에 최초로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었다. 구 소련에서 최초로 설립된 알마타한국교육원은 초기에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구 소련 전체의 모국어와 문화전통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고 소련 붕괴와 함께 지속된 경제적 어려움과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던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2003년 3월 현재 알마타한국교육원이 관할하고 있는 한글학교는 19개 대학을 포함, 168개이며 여기서 245명의 교사에게 5,424명의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1995년에는 한국국제협력단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20만 달러를 들여 설립한 한국·카자흐스탄 우정병원에 6명의 의사, 한국어교육에 14명의 단원, 태권도 등 기타 분야에 10명의 단원 등 총 30여명이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 거주 한국인은 1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초기에는 개신교선교사와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개인사업가가 수적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과 카자흐스탄 거주 한국인은 100여 년의 단절을 넘어 벌써 10년 째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정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한국인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고려인의 일부로 편입되고 또 많은 고려인들이 한국문화의 중심으로 더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초기의 외인적 관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필요로 하는 내인적 관계로 진입하고 있다.(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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