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신문 돌리던 길 따라 지금은 명함을 돌리고있죠"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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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신문 돌리던 길 따라 지금은 명함을 돌리고있죠" (7면)
  • 홍제표
  • 승인 2003.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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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었을까? 안 그래도 바쁜 여당 중진의원의 하루는 그날따라 잠시 숨돌릴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7월11일 유재건(65) 의원은 오전 7시 정각 아파트를 나서 국회로 출근했다. 베테랑 정치인답지 않게 왠지 긴장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예. 실은 오후에 중요한 토론회 사회를 맡기로 했습니다. TV토론 사회를 그렇게 오래 해봤는데도 여전히 긴장되네요"
유 의원이 말한 '중요한 토론회'는 민주당내 신당추진기구가 마련한 범국민 토론회였다. 유 의원은 김원기, 이상수, 이제정, 이해찬, 허운나 의원 등과 함께 신당추진 핵심세력으로, 이로 인해 당 안팎으로부터 공격을 받고있다.
"신당은 분당이 아닙니다. 오늘 토론회도 그런 방향으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어요" 신당은 당을 깨려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곤욕스러운듯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리고 같은 얘기를 그날 하루 서너 번은 더 했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화제를 돌렸다.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해 주시죠. 의원님 홈페이지를 보면 어릴 적에 고생이 많았다던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허허. 그래보입니까. 사실 유복한 집안 출신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한편 고맙기는 하죠. 궁해 보이는 것보다는 낫지않습니까"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유 의원은 사실 유년시절의 기억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 사는 곳도 생가에서 멀지않다. 1937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출생, 돈암초등학교와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25당시 잠깐 피난간 것을 제외하면 줄곧 돈암동에서 자란 것이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집이 가난해서 신문도 돌리고 찹쌀떡 행상도 해보고, 그러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바짓단을 걷어올려 장딴지를 보여준다. "이게 나이 육십 넘은 노인네 다리 같소?" 자랑삼아 힘을 잔뜩 넣기는 했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건강해보였다.
"어머니가 떡을 만들면 내가 그걸 들고나가 팔아오고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죠. 이 언덕배기를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내렸습니다. 나이 좀 먹었다고 다리가 쉽게 부실해지겠습니까?"   인생은 묘한 것이다. 당시 신문을 돌리던 길따라 지금은 의원 명함을 돌리고 있다. "처음 선거에 나섰을 때 명함을 돌리다보니 어린 시절의 저를 알아보는 나이 많이 드신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초년 고생 사서라도 한다는 말을 무능한 사람들의 자기변명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면서 "누구든 뜻을 세우고 열심히 추구하면 반드시 얻게된다"고 인생 선배의 조언도 곁들였다.
사실 그 말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인 듯도 했다. 그날 일어날 크고작은 정치적 사건들을 미리 예상했던 것일까. 기독교인인 유 의원은 여느 때처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30분동안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이날 묵상의 주제는 이사야서 41장 10절의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리라. 내가 너의 오른 손을 들어주리라"라는 구절이었다. 유 의원은 "실망이 클 때, 계획한 일이 잘 안될 때,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고 싶었던 사건은 이날 아침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유 의원은 오전 8시부터 의원회관 제2별실에서 비공개로 열린 신당추진기구 운영위원회 조찬모임에 참석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소 경직된 분위기에서 오후 토론회 점검과 잠시후 있을 의원총회와 본회의 대책 등을 논의했다고 장영일(32) 보좌관이 전했다. 호남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의 경우 '신당=분당'이란 오해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있다는 말도 나왔다.
유 의원은 회의에 앞서 의사당 1층 로비에 있는 해공 신익희의 동상을 찾아 함께 사진찍기를 청했다. 장 보좌관은 "신당이 신익희 선생으로부터 비롯된 민주당의 맥을 잇는 정통 민주정당임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아니겠나"고 귀띔했다.
장 보좌관의 '의원님 자랑'은 계속됐다. "우리 의원님은 젠틀한 성격입니다. 공군장교 출신이라 그런지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아무튼 무척 신사적입니다. 보좌관이 일하기 편한 분이죠. 함께 일하다보면 국회의원이 아니라 아버지나 큰삼촌 정도로 느껴질 때도 있어요"
실제로 오전 9시20분부터 시작된 자신의 홈페이지 개편 회의는 격의없는 농담이 오가는 등 시종 화기애애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무슨 얘긴가 도중 유 의원이 또 자신의 장딴지 자랑을 하자 양선모(40) 보좌관이 "장딴지만 따로 사진 한 장 찍으시죠" 하는 것이다.
홈페이지 작업을 위해 초빙된 인터넷 전문가는 '흐르는 강물을 닮은 정치인'이란 홈페이지 문구는 "다소 추상적이고 약한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그러나 "20세기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이 먹혔지만 지금은 문화와 지성을 가진 정치인이 감동과 변화를 가져온다"고 반론했다.
그러더니 다소 엉뚱한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하긴 정치인이 너무 유하기만 한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야. 가끔은 큰 소리도 좀 쳐야겠다고 싶어요" 그러면서 얼마전 지역구 행사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소개했다.
내용은 이렇다. 호남출신 유력인사의 사촌쯤 된다는 한 젊은이가 유 의원 옆에 앉아 담배연기를 연신 유 의원 얼굴에다 뿜어대며 "전라도 표 얻어서 국회의원된 것 아니냐. 그런데 왜 신당 만들어서 배신하려하느냐"고 말했다. 유 의원은 그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같은 질문이 계속 이어졌고 참다못한 유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질렀다. 생전 목소리 높이는 것을 본 적 없던 보좌진과 지역주민들이 깜짝 놀랐다. "사실 화도 났지만 그런 예의없는 사람한테는 일부러 따끔하게 혼쭐을 낼 필요가 있어" 보좌진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좌중에 웃음꽃까지 피어나며 대화가 열기를 띠는 순간 의사당 쪽으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굿모닝시티 현금수수 의혹을 받고있던 정대철 당 대표가 현금수수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유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 대표에 대한 사퇴압력이 더욱 강해질테고, 그렇게 되면 신당추진 과정에도 큰 부담이 된다. 보좌진들도 이 사건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유 의원은 급히 의사당으로 향했다. 제241회 국회 제3차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취재진이 이미 몰려들어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정 대표 행보 등을 물었다. 여당 의원들은 대부분 말을 아꼈 한나라당 의원들은 의원총회에서부터 여당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오후 12시30분. 회의가 2시간동안 정회됐다. 본회의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12시로 잡아둔 점심약속 때문이기도 했다. 의원회관내 의원식당의 그날 메뉴는 곰탕이었다. 캄보디아 대사 임기를 마치고 얼마전 귀국한 이원형 본부대사와의 약속이다.
대화는 주로 외교에 대한 것이었다. 외교는 유 의원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통일외교통상 위원회 소속으로 민주당 국제협력특위 위원장 등 주로 외교분야를 담당해왔다. 그 만큼 의원외교 활동에 적극적인 의원도 별로 없다는 평가도 자연스럽다.
"한 달에 한 번은 외국방문 스케줄이 잡힙니다. 외국 정부나 국제기구, 단체에서 초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장 보좌관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임종석, 송영길 의원 등 젊은 386의원들의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일도 늘었다. 앞으로는 정부의 공식외교 못지않게 의원들의 비공식 외교도 중요하다. 그 때문인지 젊은 의원들도 접었던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등 열성이라는 후문이다.
"국제협력특위 위원장 자격으로 중국 공산당의 초청을 받아 가보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더군요. 공산당 국제부 인력은 수백명이나 되는데 우리 당은 몇 명 안되요. 중국과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중국의 외교력이 강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듣고있던 이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식사 후 다시 본회의에 참석했던 유 의원은 오후 4시로 예정된 범국민 토론회 참석을 위해 중간에 빠져나왔다. 의원회관 1층 599석의 대회의실이 꽉 들어차고 모자라 통로에까지 자리를 깔고앉은 사람들도 많았다. 생각보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동원된 사람들도 많은가하고 물어봤다. 장 보좌관은 "지구당에서 동원하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그렇더라도 옛날처럼 금품을 제공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강조했다. 대부분 열성 당원들이라는 설명이다.
유 의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 사회자'로 소개를 받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유 의원은 다변에 달변이다. 거기에다 나이에 맞지않게 목소리까지 미성이었다. 명 사회자의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사실 토론진행은 그의 또다른 주특기다. 20여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지난 90년 귀국한 이후 5년동안 KBS와 MBC에서 시사토론을 진행했다. "TV토론을 하면서 1,160명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게 다 저의 최대 자산입니다" 토론은 그가 정치적 양식을 얻고 전국적인 인지도까지 확보해 정치에 입문할 수 있게 해준 토양인 셈이다.
오후 6시15분 토론회가 끝났다. 유 의원의 표정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것도 잠시 곧 좋지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민주당 의원들이 한나라당의 단독 표결처리를 막기위해 국회의장실 앞에서 농성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의사당 앞에서는 수행비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새벽에나 귀가하겠네"하는 푸념도 들려왔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게 정치였던가? 다행히 여야간 합의가 이뤄져 안건을 다음 회기로 넘기기로 하고 해산했다. 유 의원도 이제 쉴 시간이 된 셈이다. 농성 때문에 취소된 지역 당원 만찬행사를 다시 갈 것이냐를 놓고 보좌진과 잠깐 토론했지만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란 결론이 내려졌다. 오후 8시 긴 여름 해도 거의 넘어갈 즈음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오늘 말씀도 많이 하셨는데" 사실 토론과 사회가 특기인 유 의원도 오후가 되자 목소리에서 피로한 모습이 역력했다. "허허. 사실 오늘 말할 기회가 많았죠. 하지만 이게 다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새벽마다 눈이 번쩍 뜨입니다.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나 하고 말입니다" (2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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