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흘 밤 나흘 낮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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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흘 밤 나흘 낮을 걸었다"
  • 이신애
  • 승인 2003.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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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조 고려일보 부주필 겸 편집국장>

‘한 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흘 밤 나흘 낮을 걸었다’…
문명의 충돌과 공존,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세계화의 물결에 합류하는 것, 역사를 간직하면서 현대에 발맞추어가는 것, 그 한가운데에 폭풍의 눈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사람이 있다. 올해로 80주년을 맞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민족지 <고려일보> 부주필 겸 편집국장 김성조씨가 그 주인공이다.

<고려일보>는 1923년, 3∙1운동을 기념하여 처음으로 발간된 이후, 몇 차례 이름을 바꾸었어도 – ‘선봉’에서 ‘레닌기치’(1938년에서 1991년까지) - 구소련권 한인들의 억척스런 생명력을 대변하듯이, 때로는 번영을 누리며 때로는 끊어질 듯 위태하게, 우리민족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해온 신문이다. 김성조씨가 1990년도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려일보는, 과거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써 누렸던 번영의 기간이 다하고, 1991년 카자흐스탄 독립이후부터 지속적인 제정적 어려움에 시달려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가 신문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88 서울올림픽 이후 한반도에서 이루어낸 눈부신 발전과 함께, 몸소 겪은 분단의 고통을 넘어 언젠가 이루어낼 통일 조국의 번영에 대한 한가닥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할린의 깊은 밤, 전원을 연결하면 투박한 소리통에서 흘러나오던 지지직 소리… 이어 이리저리 한국의 라디오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 귀를 기울이시던 어른들. 몸은 비록 사할린에 있지만 떠나온 조국의 소식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가 초등학교 과정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살기는 러시아인들에 둘러싸여 살았어도 러시아어보다는 한국어에 훨씬 더 익숙했다. 해방 후 일본군들이 남기고 간 무기들이나 군복 등 여러 장비들이 쌓여있던 창고에 대한 기억, 여름이면 너무 자주 비가 왔던 것, 주로 밭에서 길렀던 감자와 양배추 농사를 도왔던 일, 토마토나 오이는 집에 모종을 심었다가 밭에 옮겨서 비닐봉지를 덮어주어야 했지만 비닐이 없어서 대신 기름종이를 덮었던 기억.

그는 광복 직후(1945년 10월 15일)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당시 10년제인 돌린스크 학교(초,중등과정)를 1962년 졸업하고 열 일곱의 나이로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모스크바 역학 대학(Power engineering institute – 대학 규모나 여러 면에서 당시 최고의 대학은 모스크바 국립대학이었고 그 다음이 바우만대학, 그 다음이 역학대학이었다고 함)을 1968년에 졸업하고 모스크바 근교의 화력발전소(자동화 시스템 분야)에서 1972년에 부인이 같은 대학을 뒤늦게 졸업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파견되기까지 근무하였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해 온 뒤 가스운송관리국에서 근무하면서, 고려극장에서 일하는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으로 순회공연을 오곤 했던 매형의 주선으로 카자흐스탄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고 1978년에는 온 가족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를 하였다. (1937년 강제이주로 인해 ‘레닌기치’의 전신인 ‘선봉’은 조선극장, 극동조선사범대학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었다)

그 해 ‘레닌기치’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시에서 알마티시로 이주를 하였는데, 사할린을 떠난 이후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한국어에 대한 애착은 그를 고려일보로 잡아끌었다. 그 당시 ‘레닌기치’의 주필은 김광현씨였는데 직원채용 시험으로 한국어 실력을 평가하기 위해 러시아어로 된 신문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해 오게 했다 한다. 중등학교 수준 이상의 한국어를 익히지 못한 그가 번역에 어려움을 겪었음은 물론이다. 중앙도서관에 가서 사전을 뒤져가며 열심히 번역을 했으나 ‘기사는 괜찮은데, 제목이 전혀 내용과 맞지 않는 번역’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고 말하면서 김성조씨는 웃음을 지었다. 레닌기치는 우리말로만 발간이 되었고 소비에트 공산당 대회 자료나 브레즈네프 연설문 등을 우리말로 번역을 해야 했는데, 그 당시 그의 우리말 실력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5개월여 만에 신문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카자흐스탄 도량형관리국 기사장으로 1990년도까지 일하게 된다.

그리고 1988년, 감격스러운 서울올림픽.
오래 전에 혹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고국을 떠나왔었으나, 1937년 스탈린 치하 강제이주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이후 한반도에서 들려오는 어두운 소식들은 소련권 거주 고려인들로 하여금 고향을 향해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갖게 하기보다, 현재 서있는 자리에 더욱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소련화’되는 데에 집중하게 했다. 왜냐하면 조국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당시 고려인들에게는, 그것만이 소비에트 연방 수많은 민족들 틈바구니에서 소수민족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북한과 남한을 포함한 개념의)은 그들에게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이었으며 그들은 점차 우리말을 잃어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국의 건재를 만방에 알리는 88 서울올림픽은 타민족들에게 괜히 주눅들곤 했던 고려인들에게 조국이 어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민으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치며 이를 악물고 일 해왔던 고려인들이 잊고 있었던, 조국에 대한 향수와 민족정체성에 대한, 조용하지만 선명한 메아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물론 그 당시엔 북한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고려인 민족 부흥기’가 시작되었다. 김성조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국과 우리말에 대한 목마름이 내내 가슴 한구석에 가시지 않고 있었다. 김성조씨가 입사한 1990년만 해도 ‘레닌기치’는 직원 30-40명 정도에 공업부, 농업부, 문화 문예부 등 제대로 갖춰진 신문이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였던 ‘레닌기치’에는 오히려 큰 타격이었다. 우즈베키스탄 등 많은 독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고려인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정부는 국영신문의 위치에 있던 민족지들에 대한 재정적인 부담을 각 민족의 문화중앙이나 협회 등에 떠맡기려 하였다. 몇 달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던 때도 있었고, 도저히 신문을 발간할 수 없어서 몇 주 건너 뛰기도 하였다. 한글판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구독자가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제정지원조차 위태롭게 되자, 1991년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러시아어로 된 주간지 ‘고려’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러시아어 8면 한국말 4면으로 구성된 현재 고려일보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고 지금은 주 1회 금요일에 발간되고 있다.

올 6월 말과 7월 초에 있었던 고려일보 80주년 기념 행사를 치른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의 침묵 끝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현재 고려인들이 민족어를 많이 잊어버리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민족어로 발간되는 신문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고려인 사회는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 90년대 이후 계속되는 재정적자로 사명감 있는 젊은 언론인들을 영입하기 어렵다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80주년을 맞아 좀 더 나은 면모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 아울러 한국과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고려일보에 애정어린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청소년시절을 같이 보냈던 동기생 14명 중 3명은 학창시절 북한 총영사관의 선전활동에 설득되어 평양으로 유학길을 떠났었다. 그 중 한 명은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오려다 국경에서 사살되었고, 두 명은 소식을 알 수 없다. 91년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조금씩 스며들어오던 자본주의 남한의 여유로움과는 사뭇 달랐겠지만 지난 소비에트 시절부터 접해오던 사회주의 북한. 과연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구소련권 고려인들이 이 두개 조국의 교량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그 문제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김성조씨는 낮은,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80주년을 맞는 ‘고려일보’의 과제라면 이 두 지역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그러나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위치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며 통일을 전망하고, 동시에 현재 속해있는 국가와 한국 양국의 발전을 위해, 아니 해외에 살고있는 동포와 한국에서 살고있는 사람 양쪽 다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서로서로를 알리고 도울 수 있는 매체의 역할이라 할 수 있을까? 80주년 행사와 관련해 이것저것 신경쓰느라 그랬는지 안색이 많이 나빠진 김성조씨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고려일보를 넉넉히 떠받쳐 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이 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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