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족공동체"는 러시아 시민사회의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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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족공동체"는 러시아 시민사회의 모델?
  • 백동인
  • 승인 2006.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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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자료, 러시아 학계에 본격 소개돼
지난 5월 10일, 딕 체이니 미국 부통령은 동유럽을 순방하는 중에 “민주주의는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며, 최근 시민단체 활동과 관련된 러시아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안에 서명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서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은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올 해 7월,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될 제 32차 G8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 의해서 다시 한번 제기될 러시아 민주주의의 대한 미국의 근본적 태도이다.

이와 같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관한 의심과 논쟁이 국제사회에 끊이지 않게 된 것은 바로 현 러시아 시민사회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그 활동과 권리를 제약 받고 있기 때문.

이미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또니오 그람쉬는 제정 러시아에서의 붉은 혁명이 성공하게 된 배경에 러시아의 시민 사회의 부재가 그 근본적인 원인임을 지적하고 시민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곳에 언제나 관료주의로 통칭되는 국가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마련이라며 러시아의 정치적 장래를 암울하게 바라본 바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철학부의 F. 스모르기노프 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러시아 국가는 역사적으로 시민사회의 역활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왔다"면서 "러시아 민주주의의 조건으로서 서구식의 "국가-시장-시민사회"의 3분법적 이행을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무리"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의 동서사회연구원을 통해서 배포된 한국의 5.18 관련 자료들이 이와 같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이행에 색다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러시아 사회학자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정치에 “시민”은 없고 “민족”만 강조되어 러시아 민족주의의 흐름이 건강한 민주주의의 자양분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사이, 소위 광주시민 대량학살 사태를 전후해서 광주의 시민사회에 일었던 “5.18 민족공동체” 모형이 러시아가 배워야 할 “시민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건강한 “민족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

다음은 동서사회연구원에서 러시아 학계에 배부한 “5. 18 민족공동체”의 자료 요약.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0일까지 열흘 동안 대한민국 광주에서 벌어진, 당시의 신군부 세력에 의한 광주시민 대량학살 사건은 그 역사적 성격이 참으로 독특하다.

이 사건은 아직도 <민중항쟁 designtimesp=25847>, <민주화운동 designtimesp=25848> 혹은 <광주사태 designtimesp=25849> 등 사태의 명칭 마저 아직 통일되지 않고 있다.

소위 5.18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말 불순분자가 시민사회에 개입하면서 발생되었는가? 김대중의 개입은 확실한가? 아니면 그것은 자발적으로 발생된, 목숨을 건 계급투쟁이었는가?

어쨌거나 5.18 이래로 우리 사회에 다시 "민족"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민족주의는 언제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지 않았던가? 5.18은 이제 다시 좀더 객관적인 시각을 요청하는 시점에 서있다.

월북 후 북한 부수상까지 지낸 홍명희는 원래 한국의 사회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1929년부터 14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저 유명한 임꺽정을 연재했다. 그것은 일개 백정이 지배계급인 양반에게 저항한다는 내용으로서 그 그림이 상당히 복잡하다. 그는 그 작품 속에서 임꺽정의 활동을 통해서 수입사회주의를 우리 민족의 갈 길로 제안했으나 해방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우리식 사회주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그려내었다.

5.18은, 1980년 이후 우리 현실 속에 뿌리 내린 “우리식 사회주의”의 독특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5.18을 계기로 우리는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5.18의 원인을 딱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5.18은 과연 피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는가? 그것도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물음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불가피론"을 편다. "군부의 조직적 개입" 외에, "경제의 대외의존도 심화"와 "산업부문간 불균형"을 야기시킨 박정희 정권의 오랜 경제정책의 결과, 주로 평야가 많은 전라도 지역의 농업부문이 황폐화되어 그로 인해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수 많은 이농 출신 노동자들의 불만이 5.18의 원인으로 함께 작동했다는 것이다. 광주시민 대량학살 사건의 배후에 그런 요소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적어도 사실로 보여진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5.18을 겪고 난 후 그것 자체로부터 발생한 관점이다.

5.18을 보는 다른 견해도 물론 존재한다. 즉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집권층이 공수부대만 보내지 않았더라도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박정희 이후 비상계엄은 늘 있어 왔다. 5.18 직전 전주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데모가 있었으나 부대장의 기지로 위기를 무마시켰다. 비상계엄과 계엄군의 진주가 늘 5.18과 같은 비극적 사건의 원인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5.18부터 5.27까지 7공수 33대대와 35대대가 광주 지역에 동원되면서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발생했다. 사건 수습 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통계로는 5.18 광주시민 대량학살 사건을 통해서 행불자를 포함, 2백 여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장 목격자들의 주장으로는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2천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정희 시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공수부대는 왠일인지 평소 사용하던 보통 곤봉보다 무려 20센티미터가 더 긴, 70센티미터 길이의 박달나무 혹은 물푸레나무 재질의 일명 <몽둥이 designtimesp=25870>로 불리는 <특수 곤봉 designtimesp=25871>으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에서 고급 야구 방망이를 제작하는 자재로서 인간에게 가격했을 때 치명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으로써 그 때가 1980년 4월 말로 5.18이 발생하기까지 불과 20여일 남은 시점. 그리고 불행한 5월 18일의 공수부대의 과격진압 사태가 발생했다.

1980년 5월 20일, 7~8백 여명의 시민이 잠을 안자며 철야 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는 데모 역사 가운데 유례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5월21일. 광주시민 가운데 30만 여명이 도청 앞에 집합했다. 인구 73만 가운데 불과 5만 여명 만이 계엄군을 피해 도시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남은 사람 가운데, 노약자와 어린이들 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청을 둘러싸고 계엄군을 상대로 진지전을 전개했다.

어떤 사람들이 계엄군을 상대로 저항했는가? 대개 잘 사는 사람들은 숨었다. 그 대신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평범한 젊은이, 자영업자, 가게나 식당 종업원, 공사판 노동자, 시장에서 일하는 아줌마, 노동자 그리고 구두닦이나 넝마주이 등의 빈민계층 등 다양한 직업을 배경으로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러 자료를 분석해보면, 주로 중산층 이하의 시민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당시 광주는 고아원 밀집지대였다. 거지나 넝마주이가 지나치게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그것은 당시 광주와 그 주변 지역이 조국 근대화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정치사회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중산층 이하, 주로 노동자와 노동자 이하의 대접을 받던 계층이 5.18의 선두에 섰다면 5.18은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 맺힌 한이 폭발한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는 것인가? 잘라 말해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광주시민의 투쟁원인은 우선 공수부대의 만행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5.18의 원인이 된 전남대 앞 초기 시위현장 상황은 “군인들이 시민을 개 패듯이 팼다”는 말로 압축된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피해자로 하여금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것에 대한 본능적으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으로부터 제압된 시민들은 일단 현장으로부터 도망을 갔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들에게 심리적 자괴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자책적 분노의 성격을 지닌다.

분노는 내적 과정을 통해서 몇 번이고 심리적으로 반복되어 졌고 …, 그들은 다시 현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도망쳐 오고, 또 다시 나와서 그곳에 가고, 다시 쫓겨 도망쳐 오고… 점차 사람들의 마음에 잠재된 분노, 즉 가난과 못 배운 사람의 한이 가세되었다. 결국, 거의 대부분의 “중산층 이하의 계층”이 싸움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잘 알려진 대로, 광주는 한 다리 건너서 모두가 아는 사이라고 할 만큼 공동체 의식이 밀접한 곳이다. 군인들의 강경진압을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었고 마침내 함께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신성한 <공동체의 의무 designtimesp=25884>에 다름 아니었다.

“돌 하나라도 던지고 와야겠다.” 5월 20일, 30만 관중이 도청에 함께 모였을 때 모두에게 이와 같은 소박한 분노의 표출이 자리 잡았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열렬한 연설을 했고 구호도 외쳤다. 물론 노래도 불렀다. 뜻밖에 다가온, 비극적 데모를 통해서 그들은 <투쟁의 공동체 designtimesp=25887>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아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다름 아닌 아리랑. 가사가 반복되는 동안 이 노래는 이내 부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마술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온 거리에 방송대곡이 터져 나왔다. 천하가 울음으로 뒤덮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모든 시민의 방성대곡, 그 울음은 도대체 어떤 성격을 띤 것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폭력을 방관했던 자책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울며 틈틈이 서로에게 찬사를 보냈다. 애정을 서로 표현하며 공동체의 일체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때(5월 20일)를 전후해서, 시민사회 내에 묘한 기류가 떠올랐다. 자가용을 헌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먹을 것을 들고 나왔다. 심지어 목숨까지 바칠 것을 다짐하는 분위기로 치달았다.

그 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으나, 개인이 없어지고 모두가 서로를 나인 것처럼 느끼는 <절대공동체 designtimesp=25894>가 형성되었다.

우리 한국인의 독특한 과음문화는 언제나 "공동체회복"이 문제이다. 너와 내가 서로 누가 누구인지 모를 만치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술을 통해 공동체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 때는 모두가 "알코올"을 자제하는 분위기였고 절대로 "폭동"으로 치달을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염두에 둔 듯, "방화" 혹은 "기물파괴"시 그것이 정당한가를 놓고 서로 이성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독특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이 날, 1980년 5월 20일은 이 "절대공동체"가 "대한민국 국가"의 권위를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성스런 공동체의 요구가 다가온다.
"광주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수호해야 하는가?
광주수호는 도청수호인가?
수호의 대상은 잠시 확실치 않은 듯 토론이 이어졌다.

그들은 진실을 지키는 것 만으로도 그 뜻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절대공동체가 느끼는 새로운 현실. 모두가 하나되어 거룩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같이 구호하고 투쟁하는 경험은 딱 무어라 짚어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 때부터 광주 시민들은 4.19와 자신의 공동체를 연관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차라리 6.25 당시의 낙동강 전투 상황과 유사했다. 광주시민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군가를 합창했다.

이제 이 짧은 글을 마감할 시간이다.

1980년대 이후 당시 광주의 경험은 어떻게 규정되었는가?
1984년부터 광주사태는 4.19 의거와 연관된다는 이론 대신 민족주의와 이를 연결 지은 “민중론”이 등장했다. 학생운동권은 이를 냉전논리나 물리력으로 저지시킬 수 없었던 민족주의와 결합된 사회주의 운동으로 해석했다. 이는 물론 통일지상주의에서 비롯된 주장이지만 당시 금남로에서 광주시민들이 느꼈던 경험은 계급 없는 사회가 실현된 통일의 경험인 것은 확실하다.

극단적인 공포와 사선을 넘어선 엄청난 희열들..
남의 생각이 아닌 우리 만의 시선으로 우리 안의 사회주의를 잠시나마 현실화시켰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이 때부터 역사는 다시 쓰여지고 우리의 이념 지평이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는 시민은 없고 민족만 강조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몇 년간 시민단체를 억압하는 대신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활동에 지속적으로 눈을 감아왔다. 이와 관련해서 국제 앰네스티(AI)는 지난 5월 5일, 외국인들에게 테러를 서슴지 않고 있는 러시아의 스킨헤드(극단적 극우인종주의자) 관련 단체들에게 러시아의 경찰과 검찰이 솜방망이 처벌로 대응하며 그들의 기를 키우고 있다면서, 스킨헤드 테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미온적 대응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었다.

이것은 광주 시민사회가 5.18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해야 할 보석 같은 “민족공동체”를 역사에 연출한 것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이어서 러시아의 지식인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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