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유럽의 국제관계 핵심 키워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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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유럽의 국제관계 핵심 키워드인가?
  • 백동인
  • 승인 2006.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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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증오한 히틀러,
러시아의 스킨헤드가 히틀러를 그들 테러의 모델로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문화의 주제로 등장한 것은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이 취하고 있는 구소련 국가와의 국제관계에 히틀러의 생각이 현실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조심스런 주장이 학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어서 논쟁의 조짐이 일고 있다.

쉥겐 조약 – 러시아를 격리시키는 견고한 유럽의 성?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에서 정치사회학을 가르치는 니콜라이 골로빈 교수(50)는 최근, 유럽 입국을 위해서 러시아인들이 밟아야 하는 비자 절차가 복잡해서 심리적으로 불쾌하기 까지 하다며 유럽국의 비자 발급 과정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우리에게 생소한 EU의 “쉥겐 조약과 그 이행협약”이 점차 러시아를 비유럽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는 여론이 러시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비등해 가고 있다.

쉥겐협정(Schengen Agreement). 이 조약은 원래 프랑스와 독일, 양자간의 국경 통과 시 발생되는 불편 해소 차원에서 1983년부터 논의가 출발되어 역시 비슷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던 베네룩스 3국이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서 1985년 6월까지 5개국이 협상 공동 문안을 만들어, 룩셈부르크의 쉥겐에서 조약에 공식 서명하면서 효력이 발생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다시 여러 가지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미비점을 보완해서 1995년 6월, “비자 시스템”, “불법 이민자 문제”, “범죄자 정보 교환을 위한 컴퓨터 자동화 시스템 구축” 등의 상세한 시행 방법을 총 망라한 “쉥겐 이행협약”을 제정 공표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 이행협약에 따르면 특별한 범죄를 추적하는 한 국가의 경찰력은 회원국 내에서도 계속해서 수사활동을 진행할 수 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거대 유럽의 치안통합의 완성을 뜻하는 것으로써 대단한 함의를 지닌다.

쉥겐 조약은 EU 통합의 결정적인 힘으로도 작용했다.

잘 알려진 대로 많은 유럽국들이 쉥겐정보시스템(SIS, Schengen Information System)이라는 정보 네트워크의 공유를 위해서 EU에 가입했다. 극단적인 예가 지난 2005년 6월, 지리적으로 EU회원국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EU의 회원 가입을 외면하던 스위스가 돌연 국민투표를 통해 이례적으로 쉥겐 조약에의 가입 결정을 내린 것. 전문가들은 스위스가 이미 쉥겐 조약에 가입함으로 궁극적으로 EU 가입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럽통합의 거대한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SIS는 한 마디로 EU '역내국경'에서 회원국에 속한모든 사람들에 대한 검색을 철폐함과 아울러 비유럽인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국경 통과 절차를 강화해서 유럽을 안전한 요새로 구축하는 것.

SIS는 EU 외부로부터의 범죄자나 불법이민을 사전에 차단키 위해 “위험경보발령 데이터”를 컴퓨터로 분류해서 수십만 명의 블랙리스트의 정보를 상호 교환하고 있는데, 이를 이용하면 각국의 수배자 및 불법이민자, 마약 및 무기 밀매자, 특히 수천 개의 조직에 달하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의 입국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회원국간 범죄예방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서 진보학계에서는 이러한 조처가 전쟁상황을 전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질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정작 쉥겐 회원국들로부터는 잠재적 범죄로부터의 정당한 방어 조처를 수행하는 것으로 평가되며 이 협약의 수행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문제는 SIS에 대한 매력으로 EU 가입을 결정한 국가들이 상당수에 달할 정도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잠재적 적 혹은 범죄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러시아인 = 공산주의자 = EU의 잠재적 범죄자?

이 시스템에 올라와 있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블랙리스트의 대부분은 다름 아닌 러시아와 기타 일부 동유럽 국가 및 이슬람 국가 출신 사람들이다. 아직도 유럽인들은 구 소비에트 체제의 핵심 국가인 러시아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 대단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1986년 서독의 저 유명한 “역사가 논쟁”에서 논쟁의 불씨를 제공한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에른스트 놀테가 제기한 “나치 범죄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단이 되었다”는 주장.

그는, 당시 독일의 보수 언론의 대표격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기고한 “흐르지 않는 과거“라는 글에서, “나치즘은 볼셰비즘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아우슈비츠는 수용소군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히틀러는 스탈린이 1918년부터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행한 ‘아시아적’ 야만을 배워와 내부적 적으로 규정된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방어적 행위로서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이 된다. 그에 따르면 히틀러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볼셰비즘이었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나치는 하필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을까?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유대인이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놀테 교수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위르겐 하버마스는 같은 해, 역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서방 국가들과의 연계를 담보하는 것은 오직 나치 시대에 대한 기억과 반성 뿐이라며 놀테를 포함해서 우파가 저지르고 있는 독일 현대사 서술에 있어서의 변명적 경향을 맹 비난하고 나섰고 독일 학계는 이 논쟁을 기점으로 완전히 좌우로 갈라섰다.

이를 통해 좌파는 도덕적 우위를, 우파는 사실에서의 우위를 받은 것에 심리적으로 자위하는 상태에서 논쟁은 수면 밑으로 잠복해 들어갔으나 문제는 다음과 같은 놀테 교수의 주장이 논리적 타당성을 앞장 세우는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즉 아우슈비츠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범죄가 아니다. 독일인의 독창성은 차라리 대량학살이 기술적 혁신(가스)의 형태로 진행된 것 정도이다. 그 보다 중요한 사실은 독일이 여전히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적대자(공산주의 체제의 변형으로서의 러시아?)의 아시아적 위협” 앞에 서 있음으로 해서 나치 폭력의 정당성이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독일의 정체성 회복 = 공산주의 체제(러시아)에 대한 경계령 발동?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일반 독일인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간단히 말해 나치 독일의 과거에 대해 침묵만을 강요하는 역사 서술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독일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4월 7일 베를린 비스바데너 거리에서 만난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인도학을 전공하는 구동독 지역 출신 대학생 엘리자베쓰 슈타인(여, 21세)은 “나치 과거를 둘러싼 좌우 논쟁에서 자신은 명분상 하버마스의 도덕적 태도에 동조하지만 그가 독일의 과거사 논쟁에서 줄곧 학문적 자료의 제시 없이 정치적 명분 만을 앞세우는 바람에 논리적 기초가 단단한 놀테 교수의 주장에 압도된 것 같다”며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많은 독일 대학생들이 자기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의미 있는 느낌표를 던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을 지지하고 송두율 교수 석방을 통한 한국 정부의 인권개선 노력에도 동참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울리히 알브레히트 베를린 자유대 교수 (63세). 그는 4월 6일 저녁, 자신의 베를린 자택에서 가진 한 모임에서 “독일의 제 3제국만이 근대 세계의 야만의 표준이 아니며 오히려 스탈린과 모택동의 대량학살에서도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독일이 새로운 국제정치 무대에서 지난 60여 년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국가적 보상과 더불어 민주적 국가 역량의 성장에 걸 맞는 국제적 책임을 이행해 왔음에도 “독일=유일무이의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 국갚라는 꼬리표가 계속 붙어 다니는 것에 대해서 깊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국제정치 분야에서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알브레히트 교수의 뜻밖의 주장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이미 작고한 독일 쾰른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1986년, 자신이 서술한 “두 개의 몰락”이라는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자신의 역사서에서 “독일인들도 유태인과 더불어 나치의 희생자”라며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힐그루버 교수에 따르면 소련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퇴각했던 독일군이 1944년 10월, 동프로이센의 네머스도르프 와 1945년 2월, 쾨니히스베르크에 다시 진주했을 때 그곳에서 붉은 군대에 의한 무자비한 양민 대학살 사건이 발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힐그루버 교수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한 독일군은 자신의 역할이 수백 년 동안 독일인이 거주해온 조국(동프로이센) 수호였을 뿐이지 자신의 방어 전쟁으로 아우슈비츠의 만행이 연장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갖지 못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애국심으로 무장된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붉은 군대의 폭력적인 복수와 강제이주로부터 수백 만 명의 생명과 자유를 구했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 독일 학계에서 폭 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계속되는 울리히 알브레히트 베를린 자유대 교수의 주장을 들어보자.

“나치가 수행한 붉은 군대와의 전쟁(2차 세계대전) 가운데 동부 독일에서 이루어진 아우슈비츠와 독일인 대량 이주 사태가 독일 국내 정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당시 국제 정치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알브레히트 교수는 그것은 철저히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에서 보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전쟁과 대량학살의 원인이 내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예방전으로서 나치가 전쟁을 수행했다는 주장은 그 자체 만으로는 이곳 저곳에서 사실로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주류 학계에서 이러한 역사서술이 솔직하게 시도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일 바깥의 전쟁 희생자들을 포함해서 독일 내 좌파가 독일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껏 이와 같은 독일 역사의 상대화는 독일 내에서 전공을 불문하고 늘 이단시되어 왔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교수와 같은 독일의 양심적인 학자들 가운데서도 이제부터라도 독일인의 관점에서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사서술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역사 서술의 조용한 변화를 호소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독일의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논쟁과 관련해서 정작 나치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 받고 있던 고르바초프 시절 이래의 러시아 학계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역사 논쟁이 러시아 사회에 소개된 것은 최근의 일로써 그나마 홀로코스트 역사 구성에 관련해서이다.

러시아의 역사 전문가들은 독일의 역사가 논쟁이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당시 서독 사회가 정치 및 경제적 성취를 바탕으로 대단한 자신감을 갖게 되어 보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이에 불안을 느낀 독일 좌파가 이의 저지를 위해 순수해야 할 학문 논쟁을 정치적인 공세로 활용한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 논쟁에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최근 창궐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스킨헤드 조직 가운데 히틀러 배우기 붐이 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히틀러가 박멸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 러시아인이었다는 주장을 듣게 될 경우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히틀러에 대한 스킨헤드의 짝사랑, 그것이 비툴어진 종말을 가져올 것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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