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룰라,두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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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룰라,두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
  • 브라질 조선일보
  • 승인 2003.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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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룰라, 두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집권 초반기를 넘기고 있다. 룰라 대통령이 지난 5개월간 국제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사이, 노 대통령도 어느덧 취임 100일의 심기일전을 다졌다.
떨어진 거리 만큼이나 문화와 사회적 배경이 다른 두 나라이지만, 두 대통령은 어찌보면 엇비슷한 환경에서 순탄치 않을 것이 분명한 여정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단면들을 따지면 두 대통령이 지고 있는 짐의 무게와 부피는 다르겠지만, 정치적인 성장과정이나 성향이 유사해 보이는 두 대통령이 펼칠 국정운영의 모습에 기대반 우려반의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국가경제가 휘청거릴 때마다 아르헨티나와 함께 브라질을 자주 들먹였다. 간단히 말하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 경우 이런 나라들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다. 실제로 이들 국가들은 과거 한때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로부터 한가한 입장을 이용해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으나 정치.사회의 실패가 경제의 쇠락으로 이어지면서 국가 자체의 침체를 가져왔다.
그러나 요즘의 브라질을 두고 더 이상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전히 실업과 기아문제가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데다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반사적 산물로 수입이 극도로 제한되고 외국인 및 기업 투자가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아 경기침체 국면이 계속되고 있으나 희망의 메시지가 멈춘 것은 아니다. 2000포인트를 웃돌던 국가위험도가 750포인트 선까지 떨어지고 달러화 약세 추세가 이어지면서 헤알화가 3헤알 선에서 안정을 보이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개혁작업이 신호탄을 올리면서 국민의 절반 이상이 개혁 이후의 과실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이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남미제국의 대표주자로서 미국과의 관계에서 당당한 목소리를 내며 국제무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노 대통령은 북한핵 문제와 한-미 관계 재정립이라는 껄끄러운 부채를 안고 출발했다. 아슬아슬하던 한-미 관계는 노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계기로 상당부분 해소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기는 하나, 북한핵 문제는 냉혹한 국제 현실에 따라 남의 손에 맡겨진 채 냉.온탕을 오가고 있다. 장외에서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세력들이 국정운영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는가 하면, 장내에서는 신당 논의로 여야가 끝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는 사이 경제는 IMF에 버금가는 구렁텅이에 빠져가고, 기업은 기업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힘겨운 신음을 내고 있다. 한편에서는 국가신용도의 현상 유지를 위해 정부 고위관리가 국제신용평가회사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정치.사회 분야
노무현 대통령의 소속당인 민주당이 집권 이전부터 원내 제2당인데다가 최근들어서는 신당 논의를 둘러싼 신주류와 구주류간의 대결양상이 심화되면서 그나마 집권당 구실을 못하고 있다. 노 대통령 스스로가 여야를 망라한 개혁세력이 결집된 신당을 만들어 차기 총선에서 전국정당을 창출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의 갈등이 증폭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집권초 정부 요직 인사를 하면서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에서도 반대하는 인물을 등용하는 뚝심을 내세운 것도 정치권 균열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 됐다. 사회적으로는 화물연대 파업, NEIS 등 잇따른 민감한 이슈를 거치면서 정책 좌표가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한 채 다수의 목소리에 끌려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표방하는 '참여'의 의미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익집단의 자기중심적 논리에 파묻히고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의 참신한 이미지에 눈높이를 한껏 높혔던 국민들은 취임 100일만에 40% 안팎의 지지율이라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던져주며 실망감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수치로 나타난 지지율이 국정의 최종적 성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김영삼,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에 비할 때 너무 가파르게 추락했다는 평가다.
반면 브라질 사상 최초의 좌파 출신인 룰라 대통령은 기존의 강성 이미지와는 달리 집권 후 정국운영에서 상당히 실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국정운영의 잣대는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적용해 나갔다. 정치적 고락을 함께해온 노동당(PT) 동지라 할지라도 국가발전이라는 대계(大計)에 걸림돌이 될 경우 과감하게 '노(NO)'를 선언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노조에 대해서도 수용할 수 없는 요구에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면 야당에 대해서는 과감한 포용자세를 견지했다. 최근 중도야당인 브라질 민주운동당(PMDB)을 연정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함으로써 능숙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같은 '중도적 실용주의 정책'과 '통합적 리더십'은 브라질을 예상 밖의 안정적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국민 지지도는 현재 80%를 넘고 있다.
▲경제 분야
한국은 IMF 위기를 겪은 국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재 외화보유고에서는 세계 상위권 수준이다. 일부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러나 최근들어서는 한국은행 총재가 밝힌대로 '저성장 고실업 시대'의 도래라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기업환경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가계부채 확대, 부동산 가격 폭등 등이 서민생활을 더욱 쪼들리게 하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 직접투자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미래를 알려주는 신호등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현상들의 배후에는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경제문제 보다는 경제외적인 문제에 국정운영의 축을 두어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새 정부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내몫찾기'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모습마저 보인데서 원인을 찾는 견해도 적지 않다. 한국 경제는 구조적인 개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도 반드시 경제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얻어진 경험이다. 개혁이라는 명분에 파묻힌 채 경제를 방치했다는 것이 출범 100일을 넘긴 노무현 정부에 대한 쓰디 쓴 평가다.
반면 룰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정.재계 지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는 한때 디폴트(채무불이행)선언 직전 상황까지 몰렸던 브라질을 전 세계 개발도상국의 경기 회복을 이끌 수 있는 견인차의 위치로 돌려놓았다. 룰라 대통령은 대선기간 동안에 내놓았던 비현실적인 공약을 스스로 집어던지고 불필요한 공공지출이나 선심성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경제안정 정책을 최우선시하는 행보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제시장의 신뢰도를 끌어올렸다. 국제금융시장에서 10억달러의 국채 발행에 성공할 정도로 대외 신인도가 크게 향상되면서 최근 브라질 헤알화 가치가 20% 평가절상될 만큼 국내 금융시장은 안정돼 있다. 무역수지 흑자 규모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각종 개혁 프로그램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조세제도 개혁법안이 의회의 1차 관문을 통과한데 이어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돼온 연금제도에도 조만간 메스가 가해질 전망이다.
▲전망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선(先) 개혁 후(後) 경제'라는 과정을 밟고 있다면, 룰라 대통령은 '선 경제 후 개혁'이라는 국정운영 스타일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는 '룰라의 길'에 대한 안팎의 평가가 우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적 지지도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일시적인 수치에 불과할 뿐 최종결과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와 더불어 가는 개혁'의 가치를 인식하고, '사람이 운영하는 시스템'에 의한 국가운영의 틀을 구축한다면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구태를 벗은 새로운 발전의 동력(動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룰라 대통령 역시 경제안정이라는 제1의 목표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개혁이 결실을 맺는다면 브라질을 새로운 면모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이다. 룰라와 노무현, 두 대통령에게 드리우고 있는 현재의 빛과 그림자가 더 강렬한 빛으로 뒤덮이기를 기대한다. /김재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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