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귀환 한인들에 뒤늦은 관심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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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귀환 한인들에 뒤늦은 관심의 빛
  • 한겨레
  • 승인 200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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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해방 당시, 징병·징용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끌려간 군인·군속·군위안부·노무자 등 해외 한인은 전체 한국인의 20%인 500만명에 이른다. 이 중 돌아온 이는 300만명에 그친다.

이런 해외 한인의 해방 후 국내 ‘귀환’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성과들이 발표된다. 국민대 한국학연구소와 한국근현대사학회는 24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국민대 본부관 3층 대회의실에서 ‘해방 후 해외 한인의 귀환 문제 연구’란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 한국현대사에서 오랫동안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던 해외 한인의 귀환사에 대한 본격적인 대규모 학술회의는 이번이 처음이다. 발표 논문은 △중국·일본·몽골·시베리아 등에서의 귀환 사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군노무자 등 특수계층의 귀환 사례 등 모두 12편이다.

국민대 장석흥 교수(역사학)는 기조발표문 ‘해방 후 귀환 문제 연구의 성과와 한계’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희생자였던 해외 한인은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귀환돼야 했는데도, 전후 해당국의 이해에 따라 귀환의 향방이 결정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밝힌다. 실제로, 미국은 200만명을 웃도는 재일 한인에 대해 ‘해방민족’과 ‘적국민’으로 취급하는 이중잣대를 일본 점령기간 내내 유지했고, 소련군 점령지역인 사할린에서는 한인의 귀환 자체가 원천봉쇄됐다. 침략전선에 강제로 배치된 한인들은 소련군에 의해 ‘포로’나 ‘전범’으로 취급받았다.

특히,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방침략의 거점으로 삼은 중국 하이난섬에서 강제노동과 성착취에 시달린 조선보국대와 군위안부의 귀환에 대한 최초의 연구가 이뤄졌다. 하이난섬에 끌려간 한인들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죄인들이었다. 죄인 신분임을 악용해 일제가 가혹하게 강제노동을 시켰음은 물론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수는 2500~3000명으로, 한국 내 전체 수형자의 10%를 웃돈다. 이 섬에 있던 군위안부는 약 1만명 가운데 수천명이 한인으로 추정된다. 이 연구를 수행한 국민대 김승일 교수는 “일제가 내팽개치고 중국 국민당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기술자·운전자를 귀환시키지 않는 바람에 하이난섬 한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처절한 귀환을 했다”며 “대부분이 비참하게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국적과 일본인 이름으로 소련군에 포로로 넘겨져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일본 관동군 소속 한인 1만~1만5천명에 대한 귀환, 몽골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던 일본군 포로에 섞여 있던 한인 귀환에 대한 연구가 현지 자료조사 등을 통해 시론 차원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것도 이번 학술회의의 성과이다. 전남 장성군·함평군에 거주하는 귀환 생존자 45명에 대한 구술조사를 한 것도 값지다. 현재 일제에 의한 강제연행 관련 구술자료는 지난 10년간 300여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생존자들의 사망으로 앞으로 3~4년이 지나면 구술조사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회의는 “한일협정에서 한국 정부가 포기한 것은 국민에 대한 외교보호권일 뿐이며, 강제연행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개인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번 학술회의 연구자들은 “희생자의 전후보상 문제는 정치·외교 논리가 아니라, 학문적 토대 위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실상을 밝힐 때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일본 정부와 학계가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지난 50년 동안 일본인 귀환 문제에 대응해온 것과 견줘 보면, ‘귀환’ 문제 관련 국내 연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1990년대 이후 조금씩 나온 국내 연구는 지금까지 10편을 밑돌고 있다. 조준상 기자 s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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