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북관대첩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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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북관대첩비 앞에서
  • 안동일 논설위원장
  • 승인 2005.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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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에는 늦여름 소나기가 장대같이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더욱이 평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미국 출장길에 잠시 짬을 내어 신사를 찾은 것이다.

사람들은 국화 문장을 뒤로하고 신전을 향해 박수치듯 손을 모으면서 연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슨 기도를 올렸을까? 팻말에 합격이며 영전 그리고 행운을 비는 기도의 안내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한참을 돌아가니 마침내 본당 뒤였다. 왼쪽으로 초라한 전각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북관대첩비 였다.

짓다만 집처럼 각목이 세워져 있는 사이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전각의 지붕이 낮고 작았기에 비가 들이쳤던지 비석은 젖어 있어 물방울을 떨구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틀림없이 울고 있는 듯 보였다.

유난히도 어두침침한 곳이어서 처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신사 내에서는 그토록 흔한 표찰이나 안내판이 전혀 없었다. 일본인들도 의아하게 여겼으련만 비석에 대한 아무런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내 눈에도 왈칵 눈물이 솟았다.‘후손들을 잘못 둔 탓에 장군의 기상과 혼백이 이렇게 설움을 당하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우산을 접고 비를 맞으며 철책을 사이에 둔 채 묵념을 올렸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까마귀 한 마리가 전각에서 저만큼 떨어져 있는 전나무 밑으로 까악 까악 대며 날아드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장군의 혼백이 보낸 비석의 수호조로 보였다.

새는 저렇게 세월을 두고 비석을 지켰는데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비석을 짓누르고 있는듯한 무지막지하게 생긴 막돌이 신경에 거슬렸다. 자신들도 계면쩍었던지 일부러 지붕을 낮게 해서 막돌을 거의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 공노할 의도와 행위는 전혀 가려져 있지 않았다.

우리 장군의 혼백을 놓고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절을 올리고 분향하지 못하고 도둑 참배하듯 철책을 놓고 인사해야 하는 내 처지와 상황이 더 서럽고 아쉽게 느껴졌다.

우리의 현실이 더 갑갑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남북이 갈라져 있었기에 지난 70년대 후반 이 비석을 발견 했음에도 환수의 노력을 현실성있게 추진 할 수 없었지 않는가. 일본 당국과 신사측이 원래 북한에 있었던 것이기에 남한에는 돌려 줄 수 없다는 이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지 않았던가.

대첩비 환수를 둘러싼 남북의 문제는 이제 거의 합의 단계에 이르렀다지만 이번엔 우리 끼리의 반목과 불협화음이 대첩비를 환수해 간들 떳떳하게 장군과 의병들의 혼백을 달래고 위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하다못해 개와 말의 동상 까지 세워 놓고 자신들의 전쟁에서 희생 당한 군견과 군마의 상징물이라 하면서 참배를 하고 그 앞에 꽃을 바치고 있는데…

나라란 무엇인가.  정문부 장군과 함경도의 민초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그 무렵의 나라는 그들에게 무엇이었던가. 핍박받고 헐벗기로 말하자면 그 시절 조선 함경도의 백성들보다 더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분연히 일어서 나라를 위해 피를 뿌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후문으로 야스쿠니를 나서는 내 발길은 묘하게도 경쾌했고 가슴은 끓고 있었다.
북관 대첩비가 트로이의 목마처럼 적진에 있지만 종국에는 승리를 담보하는 최대의 무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정 장군과 함길도 의병 선조들의 절절한 애국정신 때문이었다. 비석에는 그 힘이, 그 기(氣)가 아직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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