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려인문학을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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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고려인문학을 살리자
  • 양원식
  • 승인 2005.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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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원식
카자흐스탄 고려일보 부주필 작가
지난 7월말 카자흐스탄 남수도 알마타시에서 해외동포문학 중아시아 현지학술회의가 개최됐다. 한국 문인들의 주최로 이루어진 학술회의는 구소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극히 중요하고 뜻깊은 행사였다.

학술회의 진행 장소로 알마타시를 선정한 것은 우연치 않았다. 1920년대에 망명한인들이 러시아원동지대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망명한 기성문인들과 현지 신인 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단이 오늘날의 중아시아와 카자흐스탄 고려인문학, 더 정확히 말해서 구소련 고려인 문학인 것이다.

구소련 고려인문학이 생겨난 연대는 1923년 3월 원동에서 창간된 ‘선봉’신문의 창간 연대와 맞먹는다. 왜냐하면 ‘선봉’신문이 자기 지면에 기성및신인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을 발표해 줌으로써 재능있는 신인문학가들을 밝혀내고 결속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소련 고려인문학은 조선 프롤레타리아(카프)문학과 소련 사회주의 레알리즘 문학에 자기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조선 카프 문학 대표자의 한 사람인 조명희 작가가 원동으로 망명하여 고려인문단의 골간이 되고 막심 고리끼가 직접 지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1937년도 원동한인 강제이주와 함께 카자흐스탄이 고려인문학의 기지로 됐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바로 선봉신문의 후계인 ‘레닌기캄신문이 재개됐고 레닌기치신문 문예페이지가 고려인작가들이 자기 작품들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출판물이였고 한글 문학서적을 찍어낼 수 있은 ‘자수시’ 출판사도 바로 카자흐스탄 알마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이 강제이주 이후시기의 고려인문학의 기지로 됐던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카자흐스탄 작가동맹 산하에 고려인분과라는 것이 생겨 고려인문단 형성과 발전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글을 써 사회의 일정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만 해도 적어도 40여명은 됐고 소련 작가동맹회원으로 정식으로 된 전문작가만도 약 15명이였다. 그런데 1938년도 강제이주 초해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인 1988년도까지의 50년간 구소련에서 출판된 한글문학서적은 통틀어 14권밖엔 안된다.

그나마도 1990년대초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한글문학서적 출판은 거의 중지되고 말았다. 전에는 국가가 도와주었지만 시장 경제가 도입되면서 국가의 지원이 전혀 없어졌기 때문이다.

소련 고려인문학은 그야말로 비참한 길을 걸어왔다. 고려인사회 전반이 1930년대에는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이주 됐고 지식층 대부분은 ‘인민의 원수’란 무고한 누명을 쓰고 총살 또는 감금됐으며 흐루쇼브의 소위말하는 온화기 (1954-1956년) 전까지는 공민증도 없는 무권리한 민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검열이 너무 심하여 소베트주권과 사회주의제도, 수령을 찬양하는 작품 또는 오래전에 지나간 반봉건, 반자본주의 이데야의 작품만 쓸 수 있었다.

인체에서 발가락이 한개 없어지면 살 수는 있으나 온전한 인체라고는 할 수 없듯시 아무리 고려인문학이 변두리 문학이고 비중상 그다지 크지않다 해도 한국문학의 한부분이기 때문에 없어져 가는 것을 그냥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온 분들이 한국 이명재교수, 김종회교수, 최동호교수 (문학평론가협회 부회장), 오양호교수(한국 작가협회 평론가 분과장)등 약 20명 문인들이 왔다.

이번 학술회를 주최, 마련한 분들은 해외동포문학 편찬사업추진위원회를 무어 이미 출판된 고려인 문학서적을 재정리하고 출판되지 못한 작품들을 찾아내어 책으로 묶음으로써 고려인문학의 체계를 세워볼 의향이 이번 학술회 기본목적이였다. 한국 시사랑문화인협회가 도와주었고 물론 현지인들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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