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와 이용선생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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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와 이용선생의 추억
  • 김제완기자
  • 승인 2005.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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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0년대초 프랑스 유학중에 '자주'라는 이름의 월간잡지를 처음 대했던 기억이 새롭다. 파리의 한 식당에 놓여있던 '자주'는 제호가 또박또박했고 한국사회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주제로 한 글들이 담겨있는 '색깔있는' 잡지였다. 외국에서 발행됐음에도 정확한 한글 맞춤법은 물론 곧은 논조와 결기있는 문체로 유학생들의 관심을 모았다. 발행지는 스웨덴이었고 독일등 유럽의 지식인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이 잡지는 광주사태 직후인 80년말 창간돼 98년 지령 96호를 펴낸뒤 100호를 채우지 못하고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자주'지의 발행인 이용선생이 38년만에 고희의 나이에 스웨덴에서 서울에 들어온다. 오는 14일부터 나흘동안 서울에서 열리는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해외대표 150명과 함께 온다. 이중에는 유럽과 일본, 캐나다 지역 입국불허 인사 13명이 포함돼 있다.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입국하지 못했던 '해외망명객'들중 다수가 국민의 정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귀국했지만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있었다. 이번 입국은 사실상 최후의 망명객들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전에는 국내 관련기관과 소명절차등 입국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으며 들어오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8.15행사의 해외대표로 '당당하게' 들어온다는 점이 다르다.

이용선생은 미귀국 해외민주인사가 거론될 때마다 명단에 이름이 한줄 올라있었지만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이선생은 최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입장을 둘러 가지 않고 똑바로 말을 했다. "나는 억울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에서 보면 북의 간첩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민족적 입장에서 볼 때는 다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민족화해이다"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으로 내려온 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스웨덴에 정착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파란과 곡절이 많았던 인생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만큼 공간적인 궤적이 큰 인생을 산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선생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함남중학교를 다니다가 1.4후퇴 때 내려왔다. 54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와 대학원을 나왔다. 대학재학중에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에 이끌려 재일민단 산하 재일한국학생동맹에서 활동했다. 5.16때는 이 단체 이름으로 반군정성명을 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문에 한국정부로부터 장학금이 끊기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의 활동때문에 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지자 70년에 스웨덴으로 건너간다.

일본을 떠나기전에 재일동포 2세와 결혼했는데 그의 장인은 조총련 부의장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북한에도 세차례 다녀왔다. 통일운동가를 자임했던 그로서는 북한에 다녀온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가 한 평생 한국대사관에 나온 기관원들에게 감시대상 인물로 지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동안 한국에 거주하는 조카들까지 자신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다.

이번 서울행에는 한차례도 한국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그의 아내가 동행한다. 그동안 펴냈던 '자주'지도 들고 오겠다고 한다. 과거에 유럽 민주화운동의 향도역할을 했던 '자주'지가 이제는 해외민주화운동의 생생하고 귀한 역사적 자료로서 국내 독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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