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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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다.
  • 장세화교수
  • 승인 2005.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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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군국주의,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저지른 좌악은 나늘만큼 크다. 그러나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이 된 오늘 일본의 우익세력과 일본정부의 일부 사람들, 일본수상 고이즈미는 침략의 역사와 아세아태평양 나라들과 인민들에게 가져다준 죄악, 경제손실등을 시인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1945년 이후에 세상에 태여난 사람들과 현재 청소년들은 일본의 침략사와 만행을 잘 모르고 있다. 아울러 중국은 원래 경제총실력면에서 세계 앞선대렬의 국가에서 청나라가 쇠락되고 중화민국시기에 빈곤하고 힘없는 나라로 전략되였다. 중국이 빈곤한 대국으로 전략된 진정한 직접적인 외부원인은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락탈에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태평양에 있는 섬나라로서 면적은 37만㎢, 제2차세계대전전의 인구는 6000만이고 자원이 결핍한 나라다. 1868년 명치유신을 실행하여 자본주의가 신속히 발전하여 군사봉건제국으로 되었다.

1874년, 일본이 중국령토 대만을 침략해서부터 1945년 항일전쟁승리의 장장 71년사이에 일본은 무력침략으로 중국에서 갖은 만행을 다 했고 거액(천문수자)의 재부를 략탈해 갔다.

⒈ 1874년4월, 일본은 중국령토 대만을 침략했다.
⒉ 1881년, 일본은 중국의 유구열도(琉球郡島)을 완전히 점령했다.
⒊ 1894년 일본은 중•일 갑오전쟁(甲午戰爭)을 발동했다.

이 전쟁에서 중국북양해군은 전멸되였고, 일본은 청나라를 협박하여 일본에서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채결했다. 청정부는 아래 4항에 승인하였다: ① 조선은 완전한 자립(실제상 일본의 지배를 받음); ② 료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일본에 분할해 준다; ③ 일본에 배상금 2억량(한량은 50그람) 백은을 준다; ④ 일본인들은 중국통상항구에서 마음데로 각종 공예제조를 할수있다.

일본이 조선과 료동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짜리러시아로하여금 중국동북부의 침략계획에 용납할수 없는것이다. 그후 러시아, 독일, 불란서의 간섭으로 일본은 부득불 료동반도를 포기하고 대신에 3000만량 백은을 협박해 갔다. 이 백은 2.3억량 총액은 당시 중국재정년수입의 3배, 일본년수입의 4.5배인 거액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가져간 배상금의 90%를 군사공업발전에 이용하여 대기계생산의 공업시스템을 건립했다. 1896년 이등박문(伊藤博文)내각은 10년 군사확대계획을 마련했는데 여기에 투입될 자금 7.8억엔의 40%경비를 중국 배상금으로 충당했다.

중국인민의 피땀의 돈은 일본군사실력을 증강시켰고, 동시에 중국을 진일보 침략하는 기반을 마련한셈이다. 반면에 중국재정은 고갈되었고, 경제는 붕괴상태로 진입했으며 중국청나라 정부는 부득불 인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걷어 드리고, 다른 한편 서방열강한테 고리대돈을 꾸워서 연명하게 됐다.

⒋ 1899년, 산동에서시작한 의화단운동은 신속하게 발전하여 1900년에는 린근성시와 천진, 북경을 공제하였다. 1901년에 8국련합군은 의화단을 진압하고, 청정부를 협박하여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채결했다. 이로서 일본은 북경, 천진과 북경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이르는 중요한 지역에 일본군 주둔권을 가졌다. 그리고 북경, 천진에서 500만량 백은을 략탈했고, 청나라 궁실에서 보귀한 보물들을 모두 실어갔다. 이후에 또 배상금으로 3000만량 백은을 가져갔다.

⒌ 1927년 여름, 일본내각이 소집한 “동방회의(東方會議)”에서 무력으로 전 중국을 침략할 방침을 확정했다.

1928년6월4일, 일본관동군은 심양부근 황고둔(皇姑屯)에서 봉계군벌 장작림(張作霖)을 폭발해 죽이고, 이 기회를 타서 동북“독립”을 책동하여 동북을 독점할 음모를 실현하려고 계획하였다.

1931년9월18일 밤 10시20분에 일본관동군은 자기절로 남만철도 류조호(柳條湖)구간을 폭발하고는 도리여 중국군대가 파괴했다고 뒤집어 씨우고, 북대영(北大營)을 폭격하고, 심양성으로 진격하여 “九.一八”사변을 도발하였다. 19일 아침 6시30분에 일본군은 심양전성을 점령했다. 동북군의 손실은: 각종 화포 3,091문, 군용차 26대, 보병총 및 권총 11만8606짜루, 가관총 5894정, 비행기 262대이고, 손실가치는 18억이상이 된다.

⒍ 1931년 “九.一八”사변으로부터 1945년8월15일 일본이 투항 14년동안, 일본은 먼저 중국에 대하여 발광적이고 강도식 략탈 및 금융기편을 강해했다.
1941년말 현재, 위만화폐 발행수량은 13.17억원으로 1932년에 비하여 8배 늘어났다.
중국관내(關內)지역에서 일본이 설립한 은행은 20여개 되였다. 이 은행들은 아무 신용이 없는 위조화례를 대량적으로 발행하고, 일본군은 총칼로서 휴지와 같은 “신용”을 유지하며 중국인민의 피땀과 재부를 착취, 략탈했다.

1938년11월 화중(華中), 화남(華南)에서 “군용권(軍用券)사용방법”을 제정 및 공포했다. 소위 “권용권”은 원천적으로 화폐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본침략자들이 폭력 및 공포에 의하여 시장에서 유통하게 했다. 1938~1940말까지, 군용권발행수량은 5억엔으로 피점렴지역 인민의 재부를 무참하게 략탈했다.

1985년 일본서 출판한 《육군중야학교(陸軍中野學校)》라는 책에서 피로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본토에서 암암리에 중국화폐를 대량으로 인쇄하여 비밀리에 중국내로 운송하여 이돈으로 일본놈들이 수요되는 상품과 일본군이 사용하는 물자들을 구입하여 사용했고, 또 한편으로는 강제적으로 중국인에게 팔아넘겨서 진짜화폐로 탈바꿈해서 일본군이 사용했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일본은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중국에 류입시킨 가짜화폐는 40억원이 된다. 이는 곧 일본군이 중국 침략전쟁에서 쓴돈은 가짜돈과 위조화폐로서 충당하고 중국백성과 재부를 략탈했음을 입증한다.

2001년5월, 중국대련시에서 일본정부가 직접 발행한 “국채”를 발견했다. “국채(國債)”에 한자로 아래와 같이 인쇄했다. “대일본제국정부 대동아전쟁 할인국고채권(大日本帝國政府 大東亞戰爭 割引國庫債券)”, 발행일 “소화(昭和 18년(1943년)12월8일, 상환일: 조화 29년(1954년)1월25일”. 그리고 “대장대신(大藏大臣)”의 도장이 짔겨있다.

이 철과같은 증거는 일본놈들이 자기가 망하기전 1년이 남짓한 사이에도 중국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갈 생각을 자나깨나 잊이 않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본군의 무한한 금융략탈행위는 일본을 살찌우고 중국의 재부를 몽당다 파가서 중국은 텅비고 껍질만 남게 했다.

⒎ 일본군, 일본현병대, 일본경찰이 중국에서 사상한 군민이 모두 3500만이 된다.
일본은 중국동북의 40여개 탄광을 강점했고, 철광, 금광, 마그네슘광, 석유광등등도 강점했다. 또한 일본은 화북, 화중, 화남에서도 대부분의 공업, 광업을 강점했다.
단지 동북에서 참혹하게 학살한 로공(勞工)은 200만이 넘는다.

ㅇ 료녕부신(阜新)탄광서 략탈해간 석탄은 2600만톤, 남긴시체 만명이상 무덤이 4곳, 탄광난으로 죽은 로공이 13만이 된다. 200톤석탄 채굴할때 한명골탄광부가 죽어나갔다.

ㅇ 료녕성 무순탄광에서 일본은 2억여톤 석탄을 략탈해 갔고, 만명이상 무덤 30여곳, 사망된 탄광부는 약 30만이 된다.

ㅇ 계서(鷄西)탄광에서 일본놈들은 만명무덤을 7곳을 만들었고, 화장터 5곳건설, 10여만로공을 살해했다.

ㅇ 산서대동(山西大同)탄광서 1400만톤 석탄을 채굴해가져 갔고 만명무덤 14곳 만들었고 죽은 탄광부는 6만여명.

ㅇ 길림성 료원탄강 200㎡언덕에 매장된 탄광부시체는 179시체이다.
일본놈들은 석탄만 알지 중국로공들이 생사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1941년5월25일, 탄광갱도에서 가스가 폭발했는데 일본놈들은 벽돌로 갱도입구를 막아버리므로서 갱도안의 300여명의 탄광부는 타서 죽었다. 1949년이후 사람들이 갱도입구를 파해처보니 20여명이 갱도입구까지 달려왔으나 나오지 못하고 비참하게 벽돌뒤에서 죽은것을 발견했다. 얼마나 비참한가?

ㅇ 1944년4월, 동성광(東城矿) 1호 갱도에서 낙반사고가 일어나려할때 일본감독놈이 로공들의 탈출을 허가하지 않아서 결국 20여명이 석탄층밑에 갈려서 십몇명이 당장사망되고 나머지 모두는 중상을 입게 됐다.

ㅇ 자료에 의하면, 방가거(方家柜)광산광부들의 평균년령은 30세, 일하려온지 1년이상은 1/3미달이고, 대부분 광부들은 반년에 일본놈들의 시달림에 못견뎌 죽게 된다. 이로보아 중국 기타광부들의 상황도 생각지 않아도 잘 알수있다.

ㅇ 일본놈들은 병에 걸린 광부들의 병은 치료하지 않고 강박하여 계속 일자에 내몰고, 중병환자는 아싸리 굴며 죽게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아직 목슴이 살아있는자를 만인무덤에 던저버린다. 매번 광산갱도난이 발생하면 일본놈들은 먼저 사람을 구하는것이 아니라 갱도입구를 봉쇄하고 인위적으로 무수한 참안을 만든다.

ㅇ 1939년 산서대동탄광에서 한번 물이 터저나와 물에 잠기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2000여명 광부중 단지 6명밖에 탈출하지 못했다.

ㅇ 1940년초, 하북정형(河北井陘)탄광에서 가스폭발시에 일본탄광장은 명령하여 탄광입구를 봉하게 함으로서 1200여명 광부들이 불바다에서 타서죽게 되였다.

ㅇ 일본은 각종 군사공사에 강제적으로 로공들을 징용하여 공사가 왕공되면 왕왕 로공들을 살해해 버린다. 예로, 1939년, 일본은 구쏘련과 작전하기위하여 거대한 군사공사를 시작했다. 매년 동북과관내에서 잡아온 몇십만의 로공들이 일본광동군 공사지휘부의 감독하에 강제적으로 일을 했다. 공사가 완공된뒤에 비밀이 루실될까봐 회식등 수단으로 로공들을 집중적으로 갈라서 독사(毒死) 혹은 총살했다. 그중 단 7개 공사에서 중국로공들을 약 3만명을 살해했다.

ㅇ “七.三一”부대 세균연구센터의 주요건물을 완공이후 일본군은 3000여명의 전체 로공을 모두 비밀리에 살해했다.

ㅇ 1944년, 일본군은 내몽고 후란호터부근에서 흥안령군사공사를 완공한 뒤에 시공에 참여한 5000여 로공들을 전부 살해했다.

ㅇ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게 될때 국내로동력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조영기(東條英機)내각은 1942년11월에 《중국공인을 일본에 보낼데 대한 결정》을 반포했고, 1944년에는 일본차관급회의에서 《중국공인을 일본국내로 파견 촉진할데 관한 결정》만들어 중국 10여개성시에서 수만명공인을 징용하여 일본에서 일하게 했다. 이 공인들의 비참한 신세는 중국국내의 점령지역의 백성들과 다를바 없다.

단지 1943년4월부터 1945년5월까지 중국 선박운수공 3만8939명 (일본외무성보고에는 3만8935명으로 기재)이 도중에서 학대로 사망자를 제외하고 3만8117명이 일본에 도착했다. 이 사람들중 일본에 도달하기전 3개월내에 사망자가 2282인이다. 일본외무성이 전후통계에 의하면 3만8935명중 사망자 6830명, 상한자 6975명, 장애인 (참패자)이 467명이다.

ㅇ 일본군들은 공산당이 령도하는 근거지에 대하여 가장 참혹한 “삼광정책(三光政策)”을 실행했다. 즉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아가는 회멸작전을 실행했다. 특히는 태평양전쟁 폭발이후, 일본은 될수록 빨리 중국을 삼키기 위하여 해방구에 대하여 더욱 가혹하고 발광적인 소탕을 진행했다.

일본군의 파괴방식은 1940년10월에 화북방면군에 하달한 소탕명령에서 잘 옆볼수 이다. “무릇 적 구역내의 사람은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전부 살해할것. 모든 집은 반드시 일률로 불살라버리고, 모든 군량과 마초는 운반하지 못하는 것은 일률로 태워버리고, 솟과 그릇도 일률로 부셔버리며, 운물은 일률로 묻어버리던가 독약을 넣어라, 이로서 팔로군 및 근거지를 완전히 섬멸하는 목적을 달성해라.” 일본놈들이 잔인무도한 소탕으로 근거지인민들의 손해는 극히 가혹했다.

1938년말부터 1940년까지 일본군은 화북지역에서 1000명이상 병력의 대소탕이 109차례, 사용병력은 50만이 넘는다. 1941년부터 1942년 이년간 일본군이 화북지역에서 1000명이상 병력이 소탕이 174차례, 약 두배로 되였다. 1941년8월에 일본군 5만여명이 진찰기변구(晉察冀邊區)에서 두달간의 소탕을 진행했는데 단지 북악구(北岳區)에서 4500여명을 잔혹하게 살해했고, 15만여동 집을 불살라 태우고, 빼앗아가고 불태운 식량은 5800만근(한근 500g)이 된다. 1942년5월1일, 일본군 강촌녕차(岡村寧次)대장은 5만대군을 거느리고 기중(하북중부)에서 “5.1”대소탕을 진행하여 우리 평민들 5만여명을 붙자바 살해했다.

1937년11월, 일본군은 무석(無錫)에 침입하여 시민을 도살하는외 전 도시에 기관, 상점, 공장을 조직적으로 몽당 략탈했다. 방직공장, 제철공장의 설비와 산품을 모조리 략탈하여 봉한 뒤에 일본으로 수송해간뒤에는 불을 질려서 전무석시를 태워버렸다. 이리하여 번화한 무석시구역과 명승고적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남경(南京)시의 개인주택은 중국인것이나 외국교민것이나를 불문하고 일본군이 모조리 물로 씻듯이 씨러갔다. 도시상점, 모든화물, 그릇, 보물들을 제마음데로 략탈하여 자기들의 자동차로 실어가는 것이 마침 이사점을 실어가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일반시민의 재물을 략탈한뒤에는 시민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남경시 시민인 등지육(鄧志陸)집에서 일본병은 은돈 300개, 금팔찌 2개, 금가락찌4개, 현금 9000원 략탈하고나서 그의 어린애와 어머니를 살해하고, 집안의 모든 물건을 략탈해 가던가 부셔버렸다.

일본군은 남경성을 몽당 략탈하고 도살한뒤에 불살라서 범죄행위를 없애버려하여 훨훨타는 불길은 39일되도 꺼지지 않아서 모든 상업구역은 폐해로 되었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일본놈들의 략탈로 인하여 남경시의 재물손실은 2.46억이 된다.

1941년 구정날(춘절)에 일본군은 내몽고 왕애소(王愛召)사당를 삼일간 물씻듯이 략탈했다. 이 사당(절간)의 토지는 50무, 정전이 49칸, 법륜전이 81칸, 그안에는 불상, 금으로 만든기물, 구술, 문물들이 무지기수였다. 몽고족의 종교문화의 중심이 였다.

일본놈들은 진귀한 문물을 략탈해 간다음 각 건축에 휘발유를 뿌려 불은 질러 하늘을 찌르는 큰 불이 반달이 넘게 지속됐다. 이리하여 위대하고 장엄한 성전이 재떠미로 되여버렸다.

일본은 침화전쟁에서 중국의 930여개 도시를 점령했는데 이는 전 중국도시의 80%를 차지, 파괴받은 공장은 모두 3840개 였다. 일본공군은 광주, 상해, 중경, 소주, 란주, 귀양, 성도, 서녕등 도시를 발광적으로 무차별로 폭격하였는데 그 폭격대상은 다수가 학교, 병원, 명승고적, 주인주택, 상업구역등 비군사목표였다.

비군사목표를 발광적으로 폭격한 목적은 일본화중(華中)방면군 참모장 길본정일(吉本貞一)의 말에서 잘 알수있다. “이는 적군과 일반백성들에게 정신적 위협을 주기위함이다.”

⒏ 1932년9월16일 일본 무순수비대, 현병대는 평정산(平頂山)에서 3000명의 무고한 백성을 도살하고 700여채집을 불태웠다.

⒐ 1935년5월29일부터 6월6일까지 일본의 제제할빈만주파견군 제16사단, 389련대, 제31대는 로흑구(老黑溝) 참안을 만들었다. 이 참안에서 1000여명이 살해당했고 모든 집을 불살려 버렸다.

⒑ 1936년7월15일 일본류하수비부대는 백가보에서 368명 백성을 살해하고 집을 모조리 불살렸다.

⒒ 1940년11월부터 1941년3월까지 할빈 일본군경들은 삼조(三肇)에서 72명을 사형에 처하고, 103명을 징역에 보냈다.

⒓ 1941년2월11일 희봉구현병대, 수비대, 위경찰대는 대둔(大屯)에서 178명 살해하고 집을 모조리 불태웠다.

⒔ 1943년1월17일 승덕, 고북구, 희봉구현병대는 구호령(九虎嶺)에서 70명 중국백성을 살해했다.

⒕ 1942년2월 일본현병대는 4000여명 백성을 붇잡아서 295명을 살해했다. 이를 당지에서 “二.一”참안이라고 한다.

⒖ 1943년3월~6월, 빈강특수수사반, 바엄, 동흥의 일본위경찰 현병은 720명을 붇잡아서 126명 살해, 295명징역에 보냈다.

⒗ 1945년2월~4월, 빈강, 삼강일본특수수사반경찰, 특무들은 291명을 체포하여 210여명을 살해했다.

⒘ 일본육군117사단 중장 령목계구(鈴木啓久)는 반가대장(潘家戴莊)에서만 일반백성을 1200여명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이자는 법정에서 자기가 저지런 참혹한 도살행위를 실토했다. 예로 어머니품에 있는 애기를 빼앗아 태기쳐 죽이고, 임신부배를 갈라서 인신부와 아기를 산채로 땅에 묻어 죽였으며 날창과 기관총으로 1282명을 살해했다.

⒙ 무순전범관리소의 통계에 의하면 그곳에서 심판받고 있는 982명 일본전범 (심양특별군사법정신판의 36인포함)이 실토한데 의하면 우리포로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수는 94만9814명, 마을합병이유로 주민을 쫗자낸수가 401만명, 략탈한 식량은 3600만톤, 석탄은 2.2억톤, 철강은 2000만톤이 된다.

⒚ 1939년말까지 일본놈들은 1만3451개 집중부락을 건립하고, 만리장성을 따라 천리무인구역을 만들었는데 피해 동북동포들은 500만이 된다.

⒛ 일본광동군은 1933년에 전범 석정사랑(石井四郞)이름으로 “석정세균연구소”를 할빈에 설립했다. 1936년에는 할빈시교 평방구(平房區)에 이전하여 “만주제731부대”로 개칭했다. 따라서 장춘, 남경, 북경, 광주등 지역에서도 세균부대를 건립했다.

일본군 세균부대는 세균을 대량적으로 번식배육했다. 단지 731부대만해도 한달동안에 페스트균 500~700㎏ 제조하거나; 티푸스균 800~900㎏ 제조하거나; 탄저균 500~700㎏ 제조하거나; 콜레라균 1000㎏제조가 가승했다.

일본균은 비밀리에 체포한 항일군민, 애국자와 무고한 백성을 시험대상으로 삼고 참혹한 세균실험을 진행했고 가옥하고 독한 수단도 몇십종에 달하였다. 1939~1945년사이에 731부대가 산사람으로 세균실험을 강행하여 살해한 중국사람이 3000여명이 된다.

21. 일본군은 “九.一八”사변의 이튼날에 심양동삼성관으로 총호대금고에 보관되여 있는 16만근 황금을 몽당 씰러갔다.

22.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일본이 동북점령 14년동안에 략탈해간 석탄은 2억4000만톤, 선철은 1200만톤, 황금은 22톤, 식량은 2억2800만톤, 목제는 1억립방메터간 된다.

23. 일제는 중국동북을 영원히 점령하기위하여 1936년에 20년내에 중국 동북지역으로 백만호 이민계를 제정하고 1937년부터 대규이민정책을 실행했다. 1945년8월 일본이 투항하기전까지 일본에서 동북으로 이민은 약 10만세대 30만명이 되고 강점한 토지는 265만쌍이 된다.

24. 1937년11월19일 일본군 제19사단이 강소성 소주시를 점령하였는데 그즉시로 백여명의 젋은 녀성을 붇들어 큰 절간에 가두워 넣고 집단적으로 륜간했다. 당시 그녀들은 밤낮 알몸으로 있으면서 여지없이 륜간당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군은 나중에 그녀를 모두 호구산기슭에 끌고가서 기관총사격으로 목살시켰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 제15사단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남경시에는 1240명 종군위안부가 있었는데 그녀들중 78.9%가 중국녀인들이였다.

소지량교수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일본군이 1937년말에 강탈해간 부녀수는 강소성 소주에서 2000명이상이고, 무석시에서 3000여명이며, 절강성의 항주 한곳에서만도 2만명이 달한다.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강탈한 젋은 부녀들을 비밀리에 타지망의 다른 일본부대들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남경에서 320여명, 산서성 곡양에서 472명의 부녀들을 동북의 관동군에게 위안부로 보내주었다.

일본군은 상해, 계림등 점령지 대도시에서 녀공모집을 미끼로 처녀들을 끌어모아 위안부로 강요 및 사용했다. 일본놈들은 위안부들에게 억지로 “606”약을 먹게 하였는데 이런 약을 먹은 녀성은 더는 생육할수 없게 되였다.
중국인 위안부는 최저로 20만명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독자들은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첫 1개월동안에 강간, 륜간안건이 2만여건 발생했다는 사실을 념두에 두고 일제가 1931년 “9.18”사변부터 1945년8월15일 광복까지 14년간 얼마나 많은 중국녀인들을 유린하고 학살했는가를 가히 상상할수 있을것이다.
25. 항일전쟁 14년동안 중국군민이 사상자는 3500만명, 직접적인 재산손실은 1000억달러, 간접적인 재산손실은 5000억달러, 합해서 6000억달러이다. 이 얼마나 막대한 인명과 재산손해인가!

2005년7월26일 지만당이 지도하는 집권련맹과 재야당의원의 제출한 일본 《전후六十년결의 초안》을 공개했다. 이 결의초안에서 10년전, 즉 1995년 “전후五十년결의안”에 써넣은 “식민지통캇 및 “침략행위”라는 글자를 없애버렸다. 이는 역사적인 후퇴이다.

그리고 일본역대수상들은 갑급전범의 위령을 앉힌 야스구니찐자를 계속 참배했고, 현 고이즈미수상도 계속 참배하고 있고 또한 계속 참배할 생각이다.

우리 전체 중국인민들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하여 고도의 경각성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자기는 강직하고 굽하지 않는 기개와 존업을 충분하게, 당당히 가지고 있는가를 자성해야 할것이다.

스폐인의 철학가 쵸즈쌍타야의 하나의 명언은 “과거를 잊는 사람은 꼭 실패를 다시 되풀이 한다.”. 그러므로,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을 기념하면서 과거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과 발광적인 략탈로 인하여 중국이 막대한 인명피해와 중국빈곤의 가장 직접적인 외부원인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매개 중국사람들은 분발하여 중화민족의 대부흥을 위하여, 동북아시아 및 세계평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것이다!!

참 고 문 헌

⒈ 剪白赞、邵循正、胡华编著:《中国历史概要》, 知识出版社, 1980年7月第一版, 第62页。
⒉ 勿忘“九•一八”——东北沦陷十四年史实, 伪皇宫陈列馆。
⒊ 《军事文摘》,2005年第二期,刘定平文:《审视日本侵华战争对中国经济发展的影响》。
⒋ 张世和:《勿忘“九•一八”——评小泉参拜靖国神社和被歪曲的历史教科书》载于长春韩国学研究所编:《朝鲜•韩国学研究》, 第6辑, 2002年5月。
⒌ 江泽民主席:《首都各界纪念抗日战争暨世界反法斯战争胜利50周年大会上的讲话》。
⒍ 中国《参考消息》, 2005年7月29日。
⒎ 김성호편저: 《종군위안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년12월출판.

2005.7.29 장춘한국학연구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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