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5.18 LA항쟁과 ‘헌혈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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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5.18 LA항쟁과 ‘헌혈 압박’
  • 양필승
  • 승인 2005.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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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태평양 건너 LA에서는 200여명의 교포들이 미국 적십자사 건물을 점거하고 만 72시간 동안 ‘헌혈된 피를 광주로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전두환 정권과 대치했다.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헌혈된 피를 한국정부가 접수할 것을 요구하는 ‘헌혈 압박’ (blood push)을 통해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등 계엄군 측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의 주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물론 24시간 종일 방송하는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짐으로써, 당시 미국인에게 광주의 비극만큼이나 LA 한국인의 투쟁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부적으로 점거농성 사건은 LA의 교민 사회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어 종래 중앙정보부와 총영사관이 음으로 양으로 장악해 오던 교민사회에 대한 통제체계가 붕괴되어 한인들의 자율적인 리더십이 성립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 같은 범민족적인 투쟁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한 세대의 시간인 25년이 흘렀다. 다행히도 지난 5월 19일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 연구단 등이 주관한 5·18 25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비로소 광주 사람을 포함한 국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긴 세월동안 LA의 항쟁이 한국의, 한민족의 민주화 운동에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한 채 방황했던가?

당시 현지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국내에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LA 동포사회의 종속적인 위상을 꼽을 수 있다. 자연 광주의 문제도 본국의 민주 단체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선에서 머물렀다. 무엇보다도 LA한인들 자체가 자신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의를 느끼지 못한 채 단순히 국내의 5·18 계승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의 흐름에 피동적으로 따라갔던 셈이다.

그러나 본국 사회와의 수직적 연대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수평적 연대를 이룩할 수 있는 계기는 이미 LA 적십자사 점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LA 한인들은 단순히 광주 시민과 동참하는 선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누군가가 만약 LA의 항쟁은 이역만리 미국이어서 가능했다고 평가절하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대한민국 LA구’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의견일 뿐 아니라 농성장의 분위기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성이 시작되면서 미국 경찰들에게 밖으로 끌려 나와 체포되는 사태에 처했으며, 몇몇 사람은 목숨을 건 단식에 돌입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본국의 가족 때문에 농성현장에 나타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면서도 양심의 결정에 농성장을 지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이다.

훗날 5·18의 진정한 비극은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같은 민족 구성원이 방관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민족분열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며, 이 같은 측면에서 LA의 항쟁은 우리의 민족사를 그 같은 원죄의 구렁에서 구할 수 있다.

결코 우리 민족은 광주 사람들이 죽어갈 때 방관하지 않고 그들과 고통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해외 거주 한인들이 스스로 본국과의 관계를 수직적인 연대에서 수평적인 연대로 전환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기에 충분하다.

분명 LA항쟁은 실패다. ‘광주 사람 구하기’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LA항쟁은 우리 민족사 전체뿐만 아니라, 미주는 물론 600만 해외 교민 사회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성공이다. 당연히 전략적으로도 성공한 운동이다. psyang@mchinatown.com

※위 내용은 한국정치학회, 전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5.18연구소 공동으로 주관한 5.18 25주년 기념 학술회의 발표 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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