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 최홍희 총재 유공 인정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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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고 최홍희 총재 유공 인정되나
  • 송광호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05.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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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가 재심이 신청된 국가보훈처로부터 과연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결정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3월 서울에 소재한 창헌연구회(위원장 김훈)는 최총재의 독립유공자 서훈 재심신청서를 제출했다. ‘창헌’이란 최홍희 총재의 호. 경향신문에 따르면 재심결과는 6월 말경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종전과 달리 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들이 최총재의 독립유공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해외의 대표적 친북인사로 알려진 고 최홍희 총재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 건은 최 총재 살아생전에 비롯됐다. 2001년 한국에 거주하는 총재 친조카 최배영(73)씨에 의해 제출됐었다. 그러나 최총재가 ‘친북인사로 반한활동을 했다’는 심사위원회의 만장일치 판결로 부결된 바 있다. 

최총재는 자신이 주위로부터 친북인사라고 불림을 무척 싫어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나는 지난 76년부터 캐나다 시민권자로 오직 태권도만을 위해 살아온 순수 무도인일 따름이지 결코 친북인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왔다.

또 그는 언제나 “내 조국은 남도 북도 아니요, 오직 통일된 한반도 땅이 내 조국”이라고 강조했으며, 자신을 스스로 민족주의자라고 천명해 왔다.

최총재의 독립유공자 신청건은 그가 일제시 ‘평양학병의거’를 모의한 주모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포된 후 일본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 중 해방으로 인해 감옥에서 출옥했다.

이때 함께 징역형을 받은 김완용(육군 초대 법무감·87)씨 등은 이미 공로를 평가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이 김완용 옹과 김선하 장군 등 일부 군 동료들은 최총재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김완용 옹은 서훈 촉구청원서에서 평소 최총재 주장대로 “최홍희는 박정희와의 갈등으로 캐나다로 망명했지만 그는 평생을 태권도 보급을 위해 살다 간 인물로 재평가 받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제시 일본 중앙대학 유학중 가라데 유단자였던 최홍희는 박정희의 군 선배로 한국군 창군 요원이 돼 이승만 정권때 태권도 이름까지 명명하고 창시했었다. 만 50년 전인 지난 55년 4월 국기 태권도가 서울에서 ‘대한 태권도 협회’로 출범한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다 5·16후 최홍희는 박정희의 3선 개헌지지 압력에 항거, 지난 72년 1월 캐나다 토론토로 망명해 박정희로부터 미움을 샀다. 박정희는 최홍희가 캐나다로 망명하자 국제태권도연맹 말살정책을 펴고 통역장교출신인 김운용을 내세워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새로 만들었다.

2개 태권도 연맹이 생기면서 최홍희는 지난 80년 북한 김일 부주석 초청에 의해 태권도시범단 13명을 이끌고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이후 20여 년간 북한 태권도 보급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국제 태권도 확장 및 세미나에 여생을 바쳐왔다.

최총재는 암으로 갑자기 사망하기 2년 전부터 한국방문을 갈망했다. 그는 고향이 함북 화대출신이지만 서울에 부모산소가 있고 얼마 안남은 군 동료들과의 상봉을 위해 한국방문을 원했지만 한국 정부는 끝내 외면됐다.  

한국에선 2002년 최총재 사망 후 태권도 창시자인 그를 연구하는 태권도인 모임을 만들었고 대구의 한 대학은 최총재의 태권도(ITF)학과를 만들었다.

그는 2002년 평양에서 사망한 후 모든 그의 유품을 평양 체육촌의 태권도 전당에 모두 보냈다. 북한에선 생전 최총재를 위해 그의 고향부근인 나진-선봉에 ‘태권도 성지’를 지정했으며, 사후 묘소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khso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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