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을 달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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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을 달란 말이야!
  • 코리아나 뉴스
  • 승인 2003.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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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일본 우정성에 저금한 돈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동포여성이 있다. 여러 곳에 탄원을 하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만약 원금과 이자를 합친다면 지금은 몇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인데 억울하게 못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측에서는 모든 상환은 1965년 한일회담으로 끝났다고 답변을 하고 있다. 정부간의 협약이 개인의 예금까지 포함된 것이라는 의미인데 만약 그렇다면 한국정부가 이를 배상해야 하지 않은가?
한국정부는 이런 민원을 외면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책임에서 비켜 서 있다. 엄연히 국가가 존재하고 있고 국가기관인 우체국에 예금하여 잔고가 남아 있다면 누군가가 책임지고 찾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 일은 한국정부나 일본정부 양측 모두 성의 있는 답변을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이 예금을 찾을 수가 없다면 1965년도의 한일회담은 민간인의 재산권까지 침해하는 폭거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 김용원 씨의 진정서
사건의 개요는 이곳 LA에 거주하고 있는 김용원 씨가 1976년도 미국 대사관에, 문민정부 시절엔 대한민국 총영사관에 제출한 진정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내용은 "본인은 일제 시에 일본 우체국에 저금을 하였습니다. 下關貯金支局에 번호 71909187로 잔액은 參萬八千圓也입니다. 본인의 어머니 李一春도 같이 저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976년 내자동에 있는 김종필 씨의 한일회담 빌딩에서 어머니의 우편저금은 그 일부를 90대 1로 계산하여 5백만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金桂鳳(창씨명 小山武男)의 남은 저금 拾萬二千五百圓은 후에 다시 청구하라고 하여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희 사건을 수임하였던 배정현 변호사(지금은 사망하였음)는 본인은 미국시민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본인이 별도로 직접 찾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본인이 권리를 찾으려고 애써 보았으나 지금까지 고생만 하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이런 억울한 일을 풀어주시리라 믿고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이다.
한마디로 예금을 하였는데 해방이 되고 국가간에 청구권 자금이 오가면서 개인 재산이 공중에 뜨고 만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의 공식답변은 1999년 8월 2일자로 김용원 씨에게 왔는데 "귀하의 예금청구건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1965년 12월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다 포함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 우정성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급에 응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한일회담을 성공시킨 한국정부가 이에 대한 지급을 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 한일협정은 어떻게 되어 있나
한일회담은 박정희 정권이 형식적인 민정이양을 하면서 돈도 궁하고 공화당 창당자금과 정치자금이 필요하여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굴욕적인 회담이었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으로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고 기필코 이루어 내겠다"는 야무진(?) 각오를 하며 덤벼들었다. 사실 제2의 이완용보다 더했지만 얼마 전까지 김대중 정권과 공동으로 총리도 지내며 충청권 맹주로 군림하고 있다. 하여간 이 회담은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체결되었고 같은 해 12월 18일 그 효력이 발효된 것이다.
협정 제1조엔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무상으로 공여할 것과 2억 달러를 10년간에 걸쳐 장기저리의 차관으로 제공할 것을 정함과 동시에, 제2조 제1항에서 "한일 양국은 한일 양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한일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 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로 되어 있어 일본은 이 항목을 방패막이로 삼고 있는 것이다. 즉 껌 값 정도만 받고 체결된 협정이라 '김종필은 제2의 이완용'이란 말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의 기본재산권을 뛰어 넘은 이런 협정은 국제법상으론 유효한가? 국가는 국민이 구성원인데 구성원의 재산을 국가가 증식시켜주지는 못할 망정 엄연히 잔고가 있는 예금을 못 찾게 하는 국가는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이 협정에 나오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하자 50여 국가 사절단이 1952년 9월 4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에 모여 점령 종식과 전후의 문제를 논의하고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은 것을 말한다. 이때 네덜란드 등은 서명에 동참하지 않고 따로 협상하여 실리를 취하기도 했다. 미국이 이 회의를 주도하면서 상식선을 넘는 관대한 정책을 일본에 베푸는 것이다.
이유인즉 "만약 가혹하게 배상을 물리면 일본 경제는 붕괴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일본이 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세력을 막아주길 바라는 의도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한국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명기되었다가 나중에 일본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펄펄 뛰는 바람에 빠졌는데 이 사실은 지난 2000년 8월 22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공개되었다.
요시다 수상은 "일본 국내의 조선인은 대부분 공산주의자이므로 그들이 평화조약의 수혜자가 되어선 안된다.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조선인이 약 100만 명이나 있는 일본은 터무니없는 규모의 청구금액에 묻히고 만다"라고 언급했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 선풍이 일어 공산주의와 일대 결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공산주의자들에게 돈을 줄 수가 없다고 일본 편을 들고 만 모양이다. 이때 미국의 델레스 특사가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에게 "한국은 교전국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한 적이 없다"는 일방적인 통고로 끝나고 말았다. 많은 독립군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싸웠고 임시정부엔 광복군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한국인데 이렇게 제외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외교력은 왜 그 모양이었던가? 정보도 없고 로비할 능력이 부족했다면 할복을 하거나 단식농성을 하거나 아니면 회의장 문 앞에 들어 누워 깡이라도 부려야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멍청하게 그냥 물러서고 만 것이다. 참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패전국은 응당 보상의 책임을 지게 된다. 그리고 승리국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독일은 그래서 동서독으로 나누어지면서 소련이 동독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패전국이 일본임에도 국토는 한국이 갈라지고 지금까지 분단의 고통을 앓아오고 있다. 이 분단의 결과는 과다한 국방비 지출은 물론 매번 국론분열의 큰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 하늘이나 역사에 청구해야 하나
간략한 역사적 배경은 이러하다. 즉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한일협정을 핑계로 보상을 피하고 있고 이 강화조약은 미국이 주도하였으니 결국 미국도 일말의 책임이 없진 않다. 또 최근에 비밀 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의 6.25 동란에도 참전한 사실이 나타났다.
즉 원산상륙작전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해상보안청장 오오쿠보에게 기뢰 제거, 세균전 등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이런 부탁을 생색나게 잘 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나자 일본은 한국의 전쟁특수로 경제가 바로 도약하여 부흥의 절정기를 맞게 되는데 이게 모두 미국의 배려였다. 그리고 일본은 아주 약게도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을 빌미로 발언권을 찾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달라고 하는 명분도 얻고 막대한 보상문제도 피해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미국의 책임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상하리 만치 일본에 치우치고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헤이든 법」에 따른 강제노역 배상문제도 미국의 국무부의 입장은 일본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다해도 엄연히 통장이 있는 이 예금은 절대로 보상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 일본 한국 모두 핑퐁만 칠 것이 아니다. 예금기록이 아직 남아 있는데 왜 못 준단 말인가? AP 통신에서 노근리 사건을 보도하니 모두 관심을 가지듯이 이도 그렇게 큰 언론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이것도 사대주의 일종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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