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그대들 아직 살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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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그대들 아직 살아 있다면...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05.04.1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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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을지로를 가는 버스 창밖으로 샛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 꽃다발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복잡한 버스 노선을 외우는 것이 번거로워 지하철을 애용하다 부러 버스를 타고 여의도의 벚꽃과 도로변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나리꽃 구경을 하고 왔다.
추운 연해주에서 오래 살다보니 모처럼 맞이하는 한국의 따뜻하고 살가운 봄이 반가워 복잡한 생각들을 잊고 호사를 하고 싶어진 것이다.

며칠 전 연해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4월 7일 우수리스크에서 억울하게 총살당한 4인의 독립 운동가들의 원혼을 달래는 추모제가 이제야 열렸다는 지인의 전화였다. 서울 생활은 어떠니 연해주는 어떠니 실없이 떠들다가 추모제 소식을 들으며 금세 가슴이 답답해졌다.

독도문제와 일본의 반성을 모르는 망언, 북한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일제시대까지 두둔하는 몇몇 극우 보수들의 주장 때문에, 대다수 평화주의자인 일반 국민들의 가슴에까지 증오의 불씨가 옮겨 붙는 한국의 4월에, 비참했던 연해주 4월의 역사가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연해주 고려인 동포사회의 4월은 그 무심하고 너른 들판만큼이나 처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복도 한 귀퉁이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소화기처럼 먼지에 소복히 쌓인 채 잊혀져 가고 있는 4월 참변이 그것이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은 연해주 일대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들을 일제히 공격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스파스크 등 연해주 각지에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대량체포, 방화, 파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자행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와 한인 신보사 건물에 불을 지르고 우수리스크에서도 한인 76명을 검거하여 4월 7일, 이들 가운데 한인사회 최고원로였던 최재형을 비롯해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저명한 한인지도자 4명을 총살한다. 이때의 기습으로 연해주에서만 양민 1천여명이 희생됐다.

1919년 3.1운동으로 약이 오를 대로 올랐던 일제가 1920년 독립 무장투쟁의 배후 근거지인 연해주를 공격, 만행을 저지른 것이었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대오를 수습, 같은해 6월 홍범도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으로 통쾌한 복수를 한다.

하지만 그 후 김좌진 장군에 비해 사회주의 진영에 있었단 이유로 상대적으로 그 성과가 덜 조명된 홍범도 장군이,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속에 살아남기 위해 범부로 위장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고,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소식도 듣지 못한 채 초라한 극장지기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 비참한 민족의 드라마를 우리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연해주 독립운동가와 한인의 비참했던 궤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예 강변 인적이 드문 너른 벌판에 외롭게 세워져 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눈에 아른거린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가는 죄인에게 무덤도 쓰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며 숨져간 선생의 시신을 화장하여 이름도 낯선 라즈돌노예 강가에 뿌렸다하여 몇 해 전 세워진 유허비다.

여기저기 화사한 4월의 대한민국 서울의 꽃밭을 둘러보고 와서도 마음이 답답하기만 한 건 근래 일본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도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된 베트남 작가 반레의 소설 제목을 보고 첫 장도 못 넘긴 채 제목만 자꾸자꾸 읽어 내려갔을 때처럼, 연해주 4월의 그대들이 대한민국 서울의 화사한 차창 밖 풍경 속에 언뜻언뜻 스쳐지나 갔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대들 아직 살아 있다면...

김승력 편집위원(humanks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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