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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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베를린 리포트
  • 승인 2003.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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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는 언제 필요한가?
외국 어디를 가나 '한인회'라는 명칭의 조직을 만드는 것은 한국인들의 특성에 속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할 때 생소한 외국에서 자리잡고 생활터전을 구축해야 하는 해외교포에게 이런 단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몇 가지 사항이 없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변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또 한인회를 구성하려는 동기에 따라 마땅히 차별화해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포괄적으로 문제를 보건대 해외에서 소수민족이 갖는 조직의 필요성이란 내부적으로는 동족간의 결속을 다지면서 외부로부터 닥쳐오는 위협이나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위함일 것이다. 독일에서 현재 활약하는 외국인 단체를 보아도 이러한 틀에 맞아 들어간다. 우리와는 사회진출 역사나 영향력 및 규모로 보아 직접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 있지만, 어쨌든 필요에 따라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또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구성된 대표적인 외국인 단체가 유대인과 터키인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큰 수난을 겪어온 유대인은 아직도 불안과 위기의식이 사라지지 않은 긴장감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에게 단체형성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현재 10만 명에 달하는 독일 유대인들은 원래 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된 '독일인'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는 만큼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들의 의견 역시 이 사회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다. 터키인 역시 배경은 다를지라도 그 상황은 비슷한 면이 있다. 흔히 신나치들의 테러대상이 되곤 하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런 권리행사는 단체조직을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절실했던 한인회
다시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언어가 통하지 않고 생활문화가 생소한 지역에 정착하려던 독일생활 초창기에는 단체조직을 통해 여러모로 체계적인 조언과 도움을 받을 필요성은 누구에게나 절실했다. 그러나 종교계에서 운영하는 몇 개의 상담실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런 도움과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제 와서 과거를 뒤돌아보며 후회하고 안타까워한들 소용이 없겠지만 어쨌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정착 초창기처럼 한인회나 혹은 기타조직을 통해 실생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는 이제 거의 지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갖는 관심의 축은 확실히 옮겨져 갔다. 이제 한인회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가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성격의 한인회라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시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한인회'가 없는 외국인들
위에 예를 든 유대인과 터키인 두 민족을 제외하면, 독일에 있는 외국인 집단이 우리 '한인회'같이 자기 나라 교민전체를 포괄하는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터키인들을 보면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체를 결성하고 있다. 수 백 개인지 수 천 개인지 아무도 모를 정도라고 한다. 분야별, 지역별로 색깔이 다양한 종교, 정치, 직업인별 협회나 고향친구를 찾는 모임이 수없이 많이 조직되어 있으므로 총괄적인 '터키인 협회'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감소되는 셈이다. 실상 내부적으로는 '한인회'가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인구도 많고 또 특별히 책임지고 할만 한 일도 없다. 오히려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방어를 위한 대외섭외활동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이들의 활동은 너무 빈약하며, 오히려 학술 연구기관이 필요한 대외활동을 맡아있는 실정이다. 수 백 만의 인구라고는 하지만 아직 이들에게는 그만한 재력이나 인적자원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의 극동지역 인접국가의 교민모습을 보자. 일본인들은 기업인을 제외하고는 주로 국제결혼자가 많은데 이들은 '한인회'에 해당하는 조직은 아예 갖고 있지도 않다. 자기 할 일은 각자 알아서 깨끗이 해결해 나가며 지극히 개인중심의 사 생활을 즐기는 국민으로서 그런 조직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단지 이들이 벌이는 대외활동은 각 도시에 있는 '독일협회'(독일 일본협회)의 몫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일본과 일본문화에 관심있는 독일인들과 약간의 일본인들 중심으로 각종 강연회나 기타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뒷셀도르프에서는 일어신문이 발간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일본어 강습이 있으며, 두 개의 일본학교는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독일에서 아무런 문제도 야기시키지 않으므로 독일측과도 깊은 연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이 조용히 가정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경우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이들의 독일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80년대부터였는데 이때는 '중국인협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생업에 종사하는 중국인들은 여기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협회는 유학생중심의 모임이었다. 이 조직에 대해서는 중국정부가 깊은 관심을 갖고 배후에서 지원을 해왔다. 그러던 중 80년대 말 본국에서 천안문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 학생조직은 본국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자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고 단체도 사라짐으로써 이들의 형식적이며 전국적인 '관영조직'은 막을 내렸다. 대신 중국인들은 직업별 혹은 고향별로 소규모의 모임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모임이 이들의 주된 사교와 대화의 장이다. 언론으로는 서로 독자층을 달리하는 두 개의 주간지가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호협조정신을 보이는 중국인들은 우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인회는 친목단체
현 우리 교민의 입장에서 볼 때 한인회 역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단체이다. 지금까지 한인회는 한번도 이 한계를 넘어선 적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인회의 대외적인 활동이란 한국지향적인 관계유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수적으로 보아 소규모의 한인사회가 독일측과 문제가 발생할 사건도 없었으며, 정작 대외활동을 필요로 하는 경제인연협회는 별개의 단체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한인회 외에도 많은 단체가 있다. 학교동창 모임, 고향친구를 찾는 동향회, 스포츠 등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모임, 그리고 대학도시에는 학생회가 있으며, 이공계 전공자를 위한 협회, 또 도시마다 종교단체가 있고 한글학교도 있다. 2세들은 직업별로 구성된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단체들은 우리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모임이다. 상호 정보교환으로 생활에 이익을 주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함께 하기 위한 필요한 모임이다. 따라서 이런 모임에는 개개 구성원이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마련이다. 이런 단체야말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며 교민사회의 하위문화(Subkultur) 발상지로서 일익을 담당한다.
그러나 한인회는 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인회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출마자와 일부 주변인사들을 제외한 일반 교민들에게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의 개인적인 발전이나 생업 혹은 나의 취미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회장선거 때 참여하는 유권자의 수를 보아도 잘 나타난다. 개인적인 청을 거절하지 못해서 나온 체면유지성 투표자들이 다수를 이루기 마련이다.

한인회는 한국적 특성의 산물
외국에 있는 해외교포사회에서 한인회라든가 혹은 기타 한국인들의 단체가 원래 목적과는 상반되게 불화의 요인이 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에서 뿐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한인이 모이는 지역 어디서나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자. 마땅히 친목위주의 단체가 되어야 하는데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놓여 있다. 그 주된 원인은 모임의 단체장 자리가 곧 명예로운 감투직과 동일시하는 우리의 특성 때문이다. 이는 전세계 어느 나라 국민에게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한국적인 행동양태이다. 그 뿌리는 아마도 우리의 권력지향적인 전통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에서도 유독 한국만이 유교(Konfuzianismus)의 영향이 생활속까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나라이다. 그만큼 한국인의 감투욕(Profilierungssucht)은 우리 잠재의식(Unterbewusstsein)속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국내심리학자들의 분석이다. 과거 선비들조차 학문을 하든 도덕적인 수양을 하든 세도를 피울 수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한 정치지향, 권력지향적인 의식에 의해 지배됐다. 한국인들은 감투와 명예를 중시하고 선망하는 민족이라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교민지의 해석을 보면 '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는 서서히 감투와 명예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 미국 교민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체를 보더라도 구체적인 활동내용보다는 단체를 설립했다는 사실에 절대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즉 내용보다는 형식이 주요목표를 이룬다. 정관을 엄격하게 따지고 각종 책임부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조직, 임원선임 등 피상적인 사항에 주로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다. 단체를 위한 단체라는 형식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이런 단체가 구성된다고 할 때는 크게 관심이 없다가도 나와 어떤 식으로든 줄이 닿으면 폭발적으로 관심이 발동한다.
이러한 형식적인 단체에서 불화가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목적의식이 매우 빈약한, 친목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인 단체들이 법정쟁의까지 가게 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친목단체이므로 정관이라는 종이 한 쪽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중요치 않아서 경시할만한 정관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런 형식에 치우친 조직이며 선거며 회의를 치러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한인회는 좀 더 교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가오는 단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같은 아시아권 나라에서는 이렇게까지 극심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이 기묘한 한국적 특성의 유교문화적 뿌리와 관련해 수 년 전 본지에 인용한 적이 있던 서울대 사회계열 교수의 말씀이 다시 기억난다. '내가 이 나이에 학생들이나 가르치고 있게 됐느냐?'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대학을 떠나 국가요직까지 맡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이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 학생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이다. 다음 세대의 관심이 그의 '학문에 대한 태도'때문인지 혹은 그의 '명예욕'에 대한 놀라움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른 한 가지 예가 뉴욕시내에 조직되어 있는 노인회의 수가 16개(!)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전통있고 규모있는 노인회의 회장선거 직후 절반이 회장단에 반기를 들고나섰다. 현지 언론은 늘 꼭 같은 상투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이 기이한 현상을 관망하며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줄뿐이다.

외국인의 무관심속에 허덕이는 독일의 지방 '외국인위원회'
독일에도 이렇게 일반인의 무관심속에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힘든 단체가 있어 그 예를 소개해 본다. 소위 '외국인 위원회'(Auslaenderbeirat)라는 조직이다. 자신의 지위향상과 각종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외국인의 기구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외국인위원회에 주어진 권한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외국인의 독일어학습 등 외국인들과 자녀 교육문제에 대한 지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실제 이들의 아이디어는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이들 위원중에는 모호한 외국인의 거주문제에 대해 외국인의 편에 서지 않고 엄격한 독일행정관청의 입장에서 조언을 한다며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심한 빈축을 사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유명무실한 조직체인만큼 그 결과는 위원선출 시 외국인들의 선거참여율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약 1년전 헷센지방 외국인위원회 선거에서는 겨우 7%정도의 외국인이 투표장에 나왔다. 3-4%인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3,2%가 투표에 참여했다. 또 외국인 2세, 3세들은 거의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의미한 선거가 매년 있는데 지난 해에는 드디어 외국인 위원회에서 자체해산을 주장하는 자기비판의 의견도 나오면서 정통성조차 의문시되었다. 이 외국인위원회를 보면 이 기구가 외국인의 실생활문제와는 무관한 정부에서 만든 겉치레용 단체라는 점과 참여율이 극도로 낮다는 점에서 어느 모로 한인회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나의 삶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근방에서도 이런 일이 있다. 요즘 뉴욕시내를 떠나 뉴저지 주택가로 나가는 한인이 많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구역별로 여러 한인회가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중 3개 한인회가 2년째 회장이 없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이어지면서 한인회 무용론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한인회는 요즘은 특히 대외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교포의 영향력이 미국사회에서 그만큼 커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거장면
일부 한인회 역시 형식에 얽매인 단체라는 점에서 일반 교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통성이 문제시되기도 하겠지만, 우선 이에 앞서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양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투표율은 극히 저조한 상태인데, 그 이유 중에는 회비를 납부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한다는 관행이 있다. 나와 하등 관계없는 단체를 위해, 내가 회원으로 가입되지도 않은 협회를 위해 그리고 단 한번의 투표권행사를 위해 회비까지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방안이 출마자가 회비를 대납해주는 절차이다. 일단 유권자가 자기 돈으로 회비를 내고 투표를 한 뒤 각자 지불한 회비를 돌려 받는 방법이다. 세상에 이렇게 흉측스러운 선거형태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한국정치인들에 대해 3류니 5류니 하며 그 저질성에 대해 논한다. 우리가 그렇게 혹독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외국교포의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이 벌이는 추태가 너무나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교민사회가 보여준 창조적(?) 선거방법은 국내 정치를 훨씬 능가하는 작태였다는 데 부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초보단계에 있던 대한민국 초창기에도 이와 비교될만한 유의 선거절차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사회에서도 이런 아이디어를 발휘하면서까지 한인회에 집착했던 예는 없는 것으로 안다.

국내 정계와 해외교포
이와 같이 각종 부정적인 양태를 드러내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인회'에 연연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봄직하다. 위에서 한국인이 권력 지향적이라고 지적했지만, 교포사회 내부에서 이 '권력'을 동경하고 이를 권력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결국 이 권력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조성에 크게 이바지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외국에 나오면 한인회를 찾는 정치인들이다. 국내 정치권에서는 한인회라는 명칭의 단체를 통해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사회를 손아귀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이런 필요성은 혹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한인회가 명칭대로 한인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는 중대한 착각을 범하고 있다. 몇%의 한인들이 투표에 참여하는지는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형식에 치우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한인회'라는 명칭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이들은 한인회가 있어야만 그 지역의 한인사회가 발전한 것이라는 판단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터키인들이 수 천 개를 갖고 있다는 협회(Verein)결성은 7명이 몇 줄 안 되는 서류를 작성하여 사인하고 법원에 제출하면, 돈 한 푼 안들이고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한국 정치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명칭선택에도 전혀 구애받는 것 없이 자유롭다. .
위의 중국의 예에서도 이런 관계가 드러났지만, 독재성이 짙은 국가일수록 해외교포를 감시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 확연하다. 과거 냉전 시 소련에서 나온 과학자의 경우를 극단적인 예로 소개할 수 있다. 이들은 간혹 서독에 장기체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기혼자가 혼자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당시 엄한 체제하에 있던 이들은 자기 정부기관의 각별한 배려를 받으며 지냈다. 주말이면 으레 자기 나라 대표부에 찾아가서 신고해야 했던 것이다. 전형적인 독재체제하의 시민과 국가기관과의 상호 의존성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구태의연한 구시대적인 본국과 해외교포간의 고리는 깨져야 한다. 이런 관계는 독재시대, 독재국가에서나 중시되는 빈약한 통치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과잉보호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곧 성공적인 해외교포정책으로 보는 그릇된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한인회에 대해 '대표성'을 부여할 수 있는 한계점이 어디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권위적인 사회체계와 분위기에서 성장해온 우리에겐 이제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국내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국내에서는 정경유착의 관습이 차츰 사라지고 있듯이 해외교포를 보는 시각도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먼저 해외교포가 스스로 각성해야한다
한국정부는 해외교포가 유지하고 있는 단체들 가운데 '정부의 관여와 관심'이 크면 큰 집단일수록 이에 정비례해서 이 단체의 추태도 커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해외교포의 모습은 간접적으로 한국정부가 조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는 미국의 평통위원 선임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있는 수많은 단체들은 자기 단체의 임원이 한 사람이라도 더 평통위원에 선임되도록 하기 위해 각종 로비활동까지 벌여 문제가 되곤 한다는 것이다. 한국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국가가 가장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평통을 둘러싼 추태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일고 있다.

해외 거주 교포들은 이제 더 이상 분별력 없이 방황하는, 가련하고 측은한 모습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현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야 하는 허탈감을 이와 같이 한인사회를 통해 보상받으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 집념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몹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치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외부에서 우리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문제점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몹시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다.
우리의 바람은 국내정계 역시 해외교포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95%의 교포가 외면하고 있는 '한인회'만을 찾으며 이들을 마치 해외교포의 대표인 양 여기면서 해외교포를 장악하고 있다는 식의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정부는 해외교포에 대해 마땅히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관심의 초점은 해외교포의 현지동화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떳떳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때만이 한국정부에서 희망하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극히 소수의 해외교포를 품에 끌어들임으로써 순간적이며 가시적인 효과만을 노리는 것이 바람직한 해외교포정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2세들이 우리 1세대들의 품위없는 모습을 알게 되면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우려이다. 2세들은 여러모로 우리보다 더 나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서 배울 점이 있어야 한다.
현재 20대는 40대 이상의 세대를 우스꽝스럽게 보고 있다. 그것은 물리적인 세대간 연령의 차이만이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 한국적 특수현상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한번 비판적인 안목으로 재조명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인회는 누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우리 모두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적극적인 자세로 깊이있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 [유럽리포트 40호 2003년 1월 ]
http://www.berlin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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