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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1주년 특집 릴레이 인터뷰] ⑥ 차별받는 고려인, 그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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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1주년 특집 릴레이 인터뷰] ⑥ 차별받는 고려인, 그들을 아십니까
  • 황복희 기자
  • 승인 2024.06.10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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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완 '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사업' 공동추진위원장
전남대 명예교수, (사)동북아평화연대 6대 이사장
일제강점기, 연해주는 항일무장독립투쟁의 본거지
"고려인들, 자신의 뿌리에 자긍심 갖길"
국내 학계에서 디아스포라 및 재외동포 연구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임채완 전남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했다. 올해는 1863년 연해주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13가구의 한인이 정착한 지 160주년이 되는 해로, 임 교수는 이를 기념하는 '고려인· 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사업'의 공동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 디아스포라 및 재외동포 연구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임채완 전남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했다. 올해는 1863년 연해주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13가구의 한인이 정착한 지 160주년이 되는 해로, 임 교수는 이를 기념하는 '고려인· 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사업'의 공동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沿海州)가 갖는 영토성 및 역사성은 한민족에게 남다르다.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가 위치한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착지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은 한때 발해의 영토(698~926년) 였으며, 근대 들어 일제강점기엔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한 항일무장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당시 일제의 억압을 피해 망명가와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1918년 일제가 연해주를 점령하자 이듬해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일본군이 한인 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을 습격해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까레이스키’(까레이츠)는 당시 러시아 영토 내 ‘고려인’을 지칭하는 말로, 러시아가 1922년 일제를 몰아내고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17만여 명의 까레이츠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져 허허벌판 중앙아시아 땅에 던져졌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현재 중앙아시아 3개국과 러시아를 위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려인들은 당시 땅굴을 파서 추위를 이기고, 가지고 간 볍씨를 뿌려 살아남은 까레이츠의 후손들이다.

‘고려인’이란 호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한인(韓人)계 소련인들로서, 언어와 문화가 한 세기 이상 지나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크게 이질적인 러시아 친화적인 특성을 많이 띠고 있었기에 '조선(朝鮮)'이나 '한국(韓國)'이 아닌 '고려(高麗)'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채택한 데 따른 것이다.

세계디아스포라학회 회장을 지낸 임채완 전남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는 이들에 대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유랑민’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마침 올해는 1863년 연해주 포시에트항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13가구의 한인이 정착한 지 160주년이 되는 해다. 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을 맞아 연해주를 비롯해 국내 고려인 집거지가 있는 광주광역시, 인천, 안산, 대구, 경주 등지를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재외동포 연구가로서 해당 기념사업의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임채완 교수를 인터뷰했다.

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설명해달라. 특별히 160주년을 기념하게 된 배경은.

“1863년 함경도 조선인 농가 13가구의 연해주 이주와 정착은 근현대사 기록으로 남아있는 한인 해외이주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러시아 학계에서는 함경도 무산(茂山)의 최운보와 경흥(慶興)의 양응범, 두 사람이 이끄는 조선 농민 13가구가 1863년 월경을 엄금했던 국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에 정착한 것을 최초의 한인이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이주 160주년은 전세계 한인 이주 160주년 이기도 하다.

러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자체적으로 기념사업이 시작된 것은 이주 50년 만인 1914년이었다. 당시 '한인이주 50주년 기념회'가 조직됐고 집행부 간부로 회장 최재형, 서기 김기룡, 재무 함세인이 선출됐다. 하지만 착실하게 진행되던 50주년 기념행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무산됐다. 

그로부터 90년 후, 한국 사회에서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를 중심으로 많은 시민사회단체와 정부가 2004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고려인문화센터)’을 건립했고, 러시아 연방 정부와 한국정부 협조로 그 해 10월 모스크바에서 고려인협회가 주최한 14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2014년에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 ‘유라시아 자동차 랠리 평화 대장정’ 행사가 진행됐다. 동북아평화연대가 주최한 2014년 행사는 분단 69년만에 유라시아 고려인 동포들로 구성된 20여대 자동차 랠리팀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반도를 관통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모스크바를 출발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횡단, 두만강과 휴전선을 넘어 서울을 지나 부산으로 향한 자동차 대장정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과 유라시아 협력에 있어 재외동포들의 역할과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2024년 올해 ‘세계 고려인·한인 글로벌 네트워크의 활성화’를 목표로 시민사회단체, 학계를 포함해 전국 각지의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세계 코리안 네트워크와 문화로 유라시아 평화 협력’이라는 대회 슬로건을 정했다. ”

올해 160주년 행사는 러시아와 북한을 아우른 2014년 행사 대비 스케일 면에서 축소된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봐야 한다. 러시아와 우리 정부의 관계가 당시와는 달라지면서 양쪽 정부가 사실상 발을 뺀 상태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도 행사 취지에는 공감을 하나 한국 정부와의 관계도 그렇고 또 북한을 고려하다보니 참여가 어려워 (사)동북아평화연대를 비롯한 연해주 및 국내 70~80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민간 중심의 기념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2014년 유라시아 자동차 랠리 행사가 성사된데는 당시 모스크바에 있는 고려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북아 평화협력의 메시지를 알리는 의미에서 상징성이 있는 퍼포먼스인데 국제정치적인 이유로 못하게 돼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행사는 무엇에 중점을 두고 준비했나.

“‘고려인·한인 글로벌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이냐’가 핵심이다. 이를 위한 핵심 매개로 선택한 것이 다름아닌 ‘문화(文化)’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있는 고려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사람들은 한국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  배경에는 K-컬쳐, 즉 ‘한류(韓流)’가 자리잡고 있다. 이어 기술수준 등 한국의 발전상도 또다른 배경이다. 실례로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시내 돌아다니는 차량의 80%가 ‘티코’였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문화 공연을 중심으로 행사를 펼쳐보자 해서, ‘유라시아 대륙 암각화전’, 아티나 최 등 ‘고려인 음악가 기념공연’, ‘우즈베키스탄 고려무용단 지역순회 공연’, 160주년 이주역사를 극(劇)으로 표현한 ‘아리랑가무단 순회공연’, ‘코리안 화가전’, 고려인들이 살아온 발자취를 한 자리서 볼 수 있는 ‘사진전’ 등을 오는 7월부터 9월까지 연해주와 국내 각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해변에 각종 단체 및 기업체 등이 참여하는 전시부스를 40개 정도 설치할 계획도 갖고 있다. 주요 행사장소는 블라디보스토크와, 고려인 집거지가 있는 우수리스크이며, 1863년 이후 러시아 이주 한인이 모여 산 최초의 한인마을(지신허)이 있는 핫산에서도 전시회를 연다.”

올해는 연해주 뿐아니라 국내에서도 각종 행사를 한다고 들었다.

“예전에는 국내 행사가 거의 없었는데, 올해 160주년 행사는 광주, 인천, 안산, 경주 등지에서 세미나와 공연·전시를 할 예정이다. 이유는 우리 국민들이 고려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고려인은 현재 국내에 11만 정도가 들어와 있고, 이를 포함해 모스크바와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지에 걸쳐 약 55만 정도가 살고 있다. 700만 재외동포 가운데 미국(260만), 중국(220만), 일본(80만)에 이어 네번째로 많은 숫자다.

2010년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일명 ‘고려인 동포법’)이 제정됐으나,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F-4 비자’ 제한으로 인해 러시아·중앙아시아 출신의 고려인 동포들이 차별을 받으면서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다. 3년 단위로 갱신만 하면 국내체류에 제한이 없는 F-4(재외동포비자)를 받으려면 대졸 이상의 학력을 제시하거나 대한민국 공인 기술자격증이 있어야한다. 대부분의 고려인이 이같은 F-4 비자를 받기는 사실상 요원하다. 그러다보니 고려인들이 국내 입국할 때 H-2(방문취업비자)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비자는 최대 4년 10개월로 제한돼 있어 본국으로 돌아간뒤 다시 비자를 못받으면 국내 다른 가족과 이산가족이 돼버려 국내에 불법체류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동포사회와 학계에서 정부를 상대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F-4비자 제한을 풀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고려인들을 동포로 인식하고 국내에서 일자리도 얻고 교육 및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안그래도 일할 사람이 부족한데 이왕이면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고려인을 수용하면 정부 입장에서도 좋지 않은가.”

임채완 '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사업' 공동추진위원장은 법적 지위 등 고려인들을 적극 수용하는 정책을 정부차원에서 펴줄 것을 주문했다.   
임채완 '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사업' 공동추진위원장은 법적 지위 등 고려인들을 적극 수용하는 정책을 정부차원에서 펴줄 것을 주문했다.   

고려인들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

“한 세대를 30년으로 칠 때 160년이 흘렀으니 고려인은 5세대, 6세대, 어떤 경우 7세대까지 이어진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에 살든 중앙아시아에 살든 고향을 ‘연해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고향인 연해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는데,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 이들에게 국적을 잘 안줘 중앙아시아로 되돌아 가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부모 중 한사람이 먼저 가서 정착을 하면 그제서야 배우자나 자식을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과거에는 연해주로 이주를 했다.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젊은 고려인 후세들은 한국으로 오는 것이 목적이다. ‘희망의 나라’가 한국으로 바뀐 것이다. 한류 문화에다 기술도 앞서고 사회도 공평하다고 여기는 등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워낙 척박한 환경에서 수난을 당한 고려인들인데, 한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1937년 당시 17만 2000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됐는데, 그 과정에서 3만여 명의 노약자와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 갖은 고초 끝에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고려인들 또한 토굴에서 추운 겨울을 나는 등 가난과 질병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우슈토베와 바슈토베 공동묘지에 가보면 실감이 난다. 이같은 수난의 공백기를 지나 이후 한민족 특유의 강인함으로 가지고 간 볍씨를 재배해 쌀농사에 성공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 그야말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민족의 정체성은 언어를 통해 유지가 되는데, 스탈린의 소수민족 언어 말살 정책에 의해 고려인들은 1956년까지 강압적으로 우리말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말은 집에서 슬금슬금 사용하는 등 이어져 왔다. 제가 1990년경 프랑스 유학 중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현지에서 까레이스키 카페를 찾아갔더니 고려인들이 러시아말을 주로 하는 와중에 가끔씩 우리말이 들렸다. 그곳에서 ‘고려일보’ 기자를 소개받아 호텔에서 만났는데 고려인 4세대인데도 우리말을 아주 잘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광주에서 뜻있는 분들로부터 후원금 5000만원을 지원받아 1991~92년경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와 알마뉙, 카자흐스탄 알마티와 우슈토베, 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하바로스크 등지에 한글학교 6개를 세웠다. 지금은 ‘세종한글학교’라는 이름으로 정부 지원을 통해 한글학교가 많이 생겼다.

고려인들은 우리말만 자유롭게 못했지 김치, 추석, 돌상차림 등 전통문화는 유지해오고 있더라. 1990년에 갔을 때는 현지 나무그늘에서 고려인 할머니들이 한국에서 온 나를 보고 “화투 갖고 왔나”고 물어본 재미난 기억도 있다.”

끝없는 유랑과 악조건 속에서 고려인들이 명맥을 유지해온 비결을 전한다면.

“첫번째가 교육이고, 그 다음으로 끈질긴 근면을 들 수 있다. 농사를 천직(天職)으로 생각하는 한인들은 ”자식농사“라는 말을 쓸만큼 교육을 중시해 왔다. 유대인 못지않게 교육열이 대단하다. 척박한 땅에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각종 과일을 재배해서 꾸준히 생산성을 높여 끝끝내 부를 창출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이 한국에 와서 노동으로 부를 이루고, 교육도 받고 싶은데 제도적으로 뒷받침이 안되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 국내에 있는 고려인 자녀들의 경우 부모가 일을 나간 사이 우리말 등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고려인·한인 160주년 기념사업에 즈음해 우리 정부와 사회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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