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한국어(?) 신문 -고려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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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한국어(?) 신문 -고려일보
  • dongpo
  • 승인 2003.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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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월드넷 www.kbsworld.net 카자흐스탄 통신원 김상철님의 칼럼에서 퍼온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의 한국어(?) 신문



작성일: 02.12.04

작성자: 김상철

  요즘 저는 고려일보사에서 매일 먼지 풀풀날리는 고려일보 선행지인 "레닌기치"와 씨름하고 있습니다...해외사료 수집이라는 명목하에...그런 과정에서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소중한 신문들을 스캔하다 보면..여기 저기 훼손된 부분..잘려나간 부분이 많습니다..이때까지 보관되어 있는 신문들을 열람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다 한국연구자들인데...하여튼..정말 양심불량의 연구자들이 있어서..지금 작업을 하는 저는 정말 이런 사람들..
누군지 알면 찾아가서..따지고 싶을 정도입니다..'당신이 잘라간 그 신문..당신은 어떻게 사용했을지 모르지만..정말 너무 무책임한 행위 아니냐?"

창피한 이야기이지만...이 레닌기치를 제일먼저 보존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한 것은 어느 나라일까요?
대한민국이랴구요...유감스럽게도 틀렸습니다...일본과 미국의 연구기관들이 이미 우리는 전혀 관심이 없을때부터...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물론 일부분을 하고 중단했지만 말입니다..
그럼..고려일보와 관련된 다큐 프로그램을 가장 먼저 제작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이 역시 대한민국이라고 이야기하시면 ...땡 입니다...
역시 일본입니다...지난 1998년..즉 고려일보 창립 75주년을 즈음해서..
일본 NHK의 위성방송에서..이미 제작을 했습니다..그리고 한국은 2000년에 가서 뒷북을 쳤습니다.
KBS가 한민족리포트에서 아주 일부분을 다루었지요..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습니다만...

이번에 좀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우선 고려일보는 아직까지 홈페이지가 없습니다..그 이유는 현재는 신문을 계속 만들기에 급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홈페이지 운영같은 부분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려일보는 최전성기에..20,000부까지 발행이 되었습니다..그것도 주 5회로 말입니다..그러나..지금은 주 1회에 3,000부를 발행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부분은..바로 고려말을 이해하는 독자층의 감소..
그래서 요즘은 주1회..러시아어 12면, 한국어 4면으로 신문이 나옵니다..
이 마저도 미래는 불투명한 상황입니다..더 이상의 약진이 없다면..

현재는 카자흐스탄 정부가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에 운영을 위탁한 상황입니다..정부의 방침은 고려인 협회가 몇 년 운영하는 상황을 봐서..신문이 점점 위축될 경우..결국 제3자에게 인수토록 한다는 방침입니다...이건..고려인과 관련된 신문을 고려인과 관련없는 제3자에게 인수토록 한다면..그 누가 인수를 하겠습니다...그리고 결국 인수가 되지 않으면 폐간토록 한다는 것이 카자흐스탄 정부의 방침이겠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 위해서는...
고려일보의 구독이 확대되어야 합니다...이건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참 고려일보는 작년에 한국언론재단으로부터 장지연언론상을 받았습니다..왜냐구요? 지난 80년간 한국말로된 신문을 계속 발행해왔기 때문입니다..

참 아래는 고려일보의 약사입니다..

1860년 한민족 러시아 원동으로 이주하기 시작
20세기초까지 지속된 이주는 1910년 한일합방, 1991년 3.1 독립운동이후 본격화됨.
러시아 망명자들중에는 인텔리 계급이 많이 존재.
이들은 민족의 정신문화가 유지되지 않으면 현지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여 출판물을 만들어냄...대표적인 출판물이 신문.
대중선동, 여론형성의 매개체 측면
1907년 원동 해조신문 발행..정순만, 장기영
1909년 대동공보
1911년 대양보
1912년 신한촌에서 권업신문 발간..이상설, 이정휘 1924년 8월 126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1922년 8월 원동 우수리주 아누치노구역..공산당위원회
‘붉은기’ 조선어 신문 발간...14호 발간...4개월
1923년 3월 2일 선봉 창간
1923년 34호 발간
1924-1929년 주 2회 발간
1930-1932년 주 3회 발간
193201935년 격일로 발간
발행부수 1928년 2,000부, 1929년 3,600부, 1931년 10,000부이상 발간
1930년대초 연해주 지역, 문화, 새세대, 노동자, 적선, 노동신문, 스탈린의길, 연해주어부 등의 신문이 발간됨. 원동에서는 17개의 다양한 신문, 잡지가 출판. 이 가운데 가장 보급율이 높고 인기있었고, 오래 발간된 신문은 선봉...

1937년 선봉 신문은 1937년 9월 12일 1644호를 원동에서 출간...1937년 가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동..1937년 7개의 신문, 6개 잡지 가운데 선봉만 남기고 모두 폐간 조치.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선봉신문사 편집위원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황동훈 농업부장
신문사 재개를 위해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을 찾아가 신문사 재건을 제안...거부
엄사일..카자흐스탄 공산당에 신문사 재건 제안...카자흐스탄 공산당은 크즐오르다에서 신문사 재건을 허용..

1938년 5월 15일 구역신문의 지위로 ‘레닌기치’로 제호 변경 A4 2매 정도..월 15회 발행

1940년 3월 21일부터는 주 단위의 신문으로 지위 격상

1955년 공화국 신문, 주5회 발간, A3, 4페이지
재소한인민족신문의 부흥기...타슈켄트, 알마아타, 사마르칸드, 두산베 등 고려인이 다수
집결되어 살고 있는 지역에 지사 또는 특파원을 둠. 신문사 정원 60여명

1961년 공화국간 공동신문으로 지위 격상

1978년 레닌기치 신문사가 수도 알마아타로 이동
소련공산당과 국가이데올로기 선전기구로 이용될 수밖에 없음..엄격한 검열로 기존의 프라우다, 카자흐스탄스카야 프라우다, 프라우다 보스토크의 한계내에서 정치적인 기사를 취급할 수 있었음. 기사 작성시에는 조국, 고국, 고향이라는 용어는 사용 불가능..특히 한반도를 염두에 둔 조국, 고국을 의미에는 부정적인 의미만 사용 가능..
러시아 원동 한인들의 이주, 특히 강제이주 등에 대한 용어는 사용불가능..
레닌기치의 문예란을 통해 많은 고려인 문인들이 소련 문학과 소련고려인 문학사에 많은 흔적을 남김.

1978년 알마아타 이전 후 젊은 세대의 기자들이 많이 참여하게 됨.
당시 레닌기치 신문사의 문제점은 전문기자교육을 받은 인력이 부족..구소련내에서 한글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는 기자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의 부재.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언론, 교육, 과학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신문사에서 주로 활동, 노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할린 출신과 북한 출신들이 주로 신문사에 근무

1991년초 레닌기치는 고려일보로 개칭됨. 국영신문을 민간신문, 자유신문으로 전환..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한글판 주 3회 발행 노어판 주 1회, 총 주 4회 발행

1994년 고려일보는 다시 국가신문으로 등록됨.
1980년대말 한국, 미국에서 많은 단체들이 진출..통역의 수요가 증대되면서 통역을 할 수 있는 신문사 근무 인력들이 통역으로 진출..이중언어 구사자의 부족으로 1992년 후반기에 한글판 1부, 노어판 1부를 동시에 주 1회 발행체제로 전환
1991년이후 부터 소련체제간의 연계망 완전 붕괴..
우편네트워크의 붕괴로 인해 고려일보의 구독층은 카자흐스탄으로 한정됨...

1993년말 발행 부수 400부로 축소

1994년 후반기에 발행 부수는 다시 4,500부로 확대...

1997년 국가의 신문가격 대폭 인상으로 발행 부수 감소..

2000년 고려일보 운영권이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에 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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