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이주사 집필 지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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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이주사 집필 지원을
  • 김귀옥
  • 승인 2005.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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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이면 멕시코한인 역사는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된다. 1905년 4월초, 멕시코 유카탄 에네겐농장 브로커인 존 마이어스(John G. Meyers)가 조선 전역에 걸쳐 “‘묵서갗는 문명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여 나쁜 병질이 없는 나라이며 노동을 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의 ‘농부모집광고’를 하였다.

   
▲ 김귀옥(한성대 교수, 사회학)
그 결과 1,033여명의 조선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묵서갗(墨西哥, 멕시코의 가차음)에서 한 밑천 잡기 위해 모여들었다. 당시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앞두고 있는 때였다.

그들은 멕시코에 도착해서야 이 광고문이 그야말로 사기였음을 깨닫게 되었으나 이미 노예나 다름없는 계약에 매인 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해 7월과 11월경, 그들의 처지가 국내에도 알려져 고종은 멕시코정부에 항의 문서를 한 차례 보낸 바 있다.

하지만 미수교국인 멕시코와 외교상의 문제를 처리하기에 조선은 역부족이었다.
2005년 현재 한국에서는 그들이 멕시코에 동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태평양 저 너머에서 망국의 소식에 목 놓아 울었고,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섭씨 40도의 더위 속에 노역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한글과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열었다.

안창호 선생이 그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 영향을 받아 독립기금을 모으기도 했고, ‘숭무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잊혀져갔다. 해방 후에도 조국은 그들을 찾지 않았다. 1962년 한국이 멕시코와 수교를 맺던 과정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찾지 않았다.

1995년 필자의 멕시코 답사 때의 경험이었다. 그해 7월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멕시코한인 후세대들을 만나기 위해 재멕시코시티 한국대사관에 전화했을 때, 주재원은 그 후세대들을 그저 ‘원주민’일 뿐 멕시코한인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1905년의 멕시코한인들이 조국을 잊은 것이 아니라, 조국이 그들을 잊어버린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역사적 기민(棄民)이 되었다.

멕시코한인이주 100년이 되는 올해, 여러 가지 행사는 준비되고 있지만 멕시코한인이주사의 집필은 아직도 요원하다. 1990년대초엔가 일본정부의 지원하에 멕시코일본인들이 방대한 멕시코일본인이주사를 직접 집필했던 것에서 반면교사를 찾아야 한다. 멕시코일본인 스스로 이주사를 썼을 때, 얼마나 그들의 자긍심이 높아졌겠는가를 상상해보라.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회복하고 일본과 멕시코의 교량으로서 거듭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현재 우리는 멕시코한인들의 대략적인 분포 및 역내 이주, 사회경제적 구조, 후세대의 규모, 멕시코정부와의 관계, 사회적 업적이나 기여, 언어나 생활양식의 변천과정, 결혼 및 친인척 연결망, 심지어 쿠바이주로 이어진 쿠바한인 등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상황 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이 가진 공·사적 문헌 자료나 영상 자료들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망실 중에 있다. 그나마 국내외에서 수행되고 있는 멕시코한인연구는 아직도 개론적이며 단편적인 연구에 불과하다. 멕시코한인연구 전문가도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에 어렵사리 수행하고 있는 멕시코한인 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 규모라는 것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게 우리 실정이다.

우리가 진정 멕시코한인이주사를 기록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들에게 다문화적 민족정체성을 심어주려면, 그들 스스로 100년의 역사를 쓸 수 있도록 한국 정부는 지원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한국을 위한 이주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한 역사를 스스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freeox@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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