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스콩트 예스테쉬?’ 너는 어디서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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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스콩트 예스테쉬?’ 너는 어디서 왔니?
  •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 승인 2022.05.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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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br>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스콩트 예스테쉬(Skąd jesteś)?” 

폴란드어로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23년간 해외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현지인들의 눈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기에 아마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듣게 될 것 같다.

당황스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이젠 ‘한국사람 같지 않다’고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더니, 폴란드 살이 20여년 동안 가치관만큼이나 생김새도 많이 변했나 보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킴 예스템(Kim jestem, 나는 누구인가)?”

언젠가부터는 너스레를 떨며 “나는 한쿡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과 폴란드 경계선에 선 자”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의 딸 심다혜 씨의 작품 전시회 티켓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의 딸 심다혜 씨의 작품 전시회 티켓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얼마 전, 폴란드에서 출생해 건강하고 밝게 성장해 준 딸의 작품 전시회가 있었다. 미대 진학을 준비 중인 딸의 전시회 테마가 ‘나는 누구인가?’였다.

어릴 적 장난끼 많고 쾌활하던 아이가 부모 품을 떠나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타인에 의해 ‘다름’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슬퍼하는 아이를 붙잡고 엄마는 ‘특별’한 것이라고 다독였다.

‘소외된 자의 관심’(심다혜 作). 초등학교 시절 학교 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딸이 가장 싫어했던 점심시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딸은 이 시간을 관심의 대상이지만 이질감을 느껴야 했던,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과 그것이 좋은 게 아님을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소외된 자의 관심’(심다혜 作). 초등학교 시절 학교 내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딸이 가장 싫어했던 점심시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딸은 이 시간을 관심의 대상이지만 이질감을 느껴야 했던,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과 그것이 좋은 게 아님을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사춘기를 겪으며 내성적인 성향으로 바뀌는 딸아이를 내심 걱정하는 부모에게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도 이곳에선 외국인이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판단돼서 그랬나 보다. 

초등학교까지 유일한 동양인으로 살아온 딸은 ‘특별’하다는 말을 싫어한다. ‘평범’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 가슴에 담아뒀던 슬픔을 구현한 작품 설명을 들으며 모녀는 슬피 울었다. 

‘살기 위해 익사’(심다혜 作). 폴란드에 나고 자란 딸은 이 작품을 “한국 문화를 포기하고 폴란드 문화와 환경을 몸이 익히려는 시도이자, 깊은 바다에 빠져 내 자신을 식히려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우주 비행사 아래 고래상어는 기회를 상징하며 깊은 바다에서 자신을 데려갈 지지의 손이라고 표현했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살기 위해 익사’(심다혜 作). 폴란드에 나고 자란 딸은 이 작품을 “한국 문화를 포기하고 폴란드 문화와 환경을 몸이 익히려는 시도이자, 깊은 바다에 빠져 내 자신을 식히려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우주 비행사 아래 고래상어는 기회를 상징하며 깊은 바다에서 자신을 데려갈 지지의 손이라고 표현했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예상 밖의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찾아 주었다.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다는 딸의 우려와는 달리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한 손님들의 질문에 답하는 딸은 홀로서기 중이다. 

그 딸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아빠는 그간의 아픔 가득한 자식을 안아주지 못한 미안함과 혼자서 잘 이겨낸 대견함에 만감이 교차했다. 

‘(안) 괜찮아’(심다혜 作-). 다른 별들처럼 빛나고 ‘보통’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불을 붙이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초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스모그만 나오고, 사라지는 스모그 속에 비명을 지르고 좌절하는 사람들은 내면의 정체성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상징한다. 이 감정들은 자외선에서만 볼 수 있도록 묘사됐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안) 괜찮아’(심다혜 作-). 다른 별들처럼 빛나고 ‘보통’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불을 붙이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초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스모그만 나오고, 사라지는 스모그 속에 비명을 지르고 좌절하는 사람들은 내면의 정체성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상징한다. 이 감정들은 자외선에서만 볼 수 있도록 묘사됐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격려와 칭찬 속에 우려했던 전시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마냥 꼬맹이인줄 알았는데 그간의 고민만큼이나 깊어진 내면의 자아를 훌륭히 형성한 자식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곤경에 처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무수히 하겠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숲처럼 깊고 강물처럼 타인을 품을 줄 아는 평범한 인간으로 거듭나길 응원해 본다.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필자의 가정만이 아니라 모든 재외동포들이 겪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각자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무겁다고 하겠으나 주권 빼앗긴 나라를 조국으로 둔 탓에 유라시아 대륙에 강제로 흩어진 고려인들, 그 중에서도 전쟁으로 지금까지 고통 받는 우크라이나 고려인에 견줄까?

역사의 격변기마다 타인에 의해 국적도, 언어도, 문화도 강요받으며 타국살이를 해 온 그들은 거친 삶만큼이나 수많은 상처들로 옹이 가득한 이들이기에 섣불리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평시에도 고려인 3,4세들은 숱한 정체성 혼란을 겪어왔다. 유럽에서 1만명에 불과한 아시아계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차별의 연속이다. 일부는 고려인이라는 딱지를 떼내기 위해 철저히 현지화되려 애쓰겠고 어떤 이는 지금도 수없이 되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전쟁 발발 두 달이 지났다. 아직도 교전 중이며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장기화될수록 희생자도 늘고 국내, 국외 피란민들도 모두 지쳐만 간다. 달력을 떼낼수록 세간의 관심도 덩달아 떨어지고 있다. 

전선에 나가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고려인들이 많다. 하지만 극도로 예민해진 전시상황에 일부는 전선에서도 후방에서도 ‘스파이’로 오해 받고 있다. 전쟁사에서 늘상 보아온 모습이긴 하나 그 대상이 같은 동포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우크라이나 내에선 아시아계 소수민족 고려인, 한인사회에선 한국말 못하는 우크라이나인 취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누구인가? 
동포인가, 우크라이나인인가? 
우리가 답해줘야 한다.

1만명의 고려인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며 서러운 질문을 강요당하는 지금까지 정권교체를 앞둔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묵묵부답이다. 

고려인에 대한 지원은 없었으나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해오고 있으니 이미 답변을 한 건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인이라고…….

대한민국이 모국임을 천명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 자식의 눈물과 한숨을 외면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전쟁통 고려인에 대해 무관심한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그들을 대신해 우리가 질문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게 한국계 재외동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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