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하라 강제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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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하라 강제노역!
  • 코리아나 뉴스
  • 승인 2003.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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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묻혔던 강제노역 밀린 임금을 달라!
보상청구는 2010년까지

이민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인타운이 분주하다. 그러나 이 세월 속에 묻힌 피해자들의 응어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며 <을사보호조약> 이후 망각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를 거쳐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친일파들과 야합하여 정통성이 없었기에 올바른 역사를 인식할 기회가 없었다

지난 19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헤이든법〉이 법제화됨에 따라 세계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과 관련된 기업에 의한 징용 피해자가 2010년까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돼 한인 정재원 씨가 일본의 오노다 시멘트 회사를 제소 오는 9월경에 1차 판결이 날 전망이다

올 2003년은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이와관련 한인들이 첫발을 내 딛은 하와이를 비롯 LA와 중가주 등지에서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고  지난 1월 1일 로즈퍼레이드의 화려한 꽃차 행렬을 위시하여 각종 기념사업회가 나름의 준비로 의미 있는 일들을 기획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백주년에 대한 잔치와 축제만 가질 것이 아니다. 〈100〉이라는 수치에 내재되어 있는 역사성과 함께 그 세월에 묻혀 응어리진 사연들에도 귀를 기울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99년에 법제화된 「헤이든법」에 의거, 일본 기업인 오노다(현 다이헤이오) 시멘트사에 제기한 정재원(81세) 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이 소송은 강제 노역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청춘을 바쳐야 했던 한 노동자의 아픈 과거를 살려냄과 동시에 역사속에 묻혀 가려진 진실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지는 이 소송의 근간이 되는 「헤이든법」의 폭넓은 이해와 적용을 돕기 위해 을사보호조약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간략한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자료와 기회가 닿는 대로 계속 보도할 예정이다.

◎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아시나요?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은 1910년의 〈한일합방〉을 예고한 전주곡이었다. 조약에서 '보호'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 벌써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인데 그 말만으로도 자주권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지면에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을 때 민중들은 의병을 일으키고 결사항전으로 맞섰다는 사실이다. 즉 항상 위기에는 민중들이 나서고 귀족들은 다 뒤로 꽁무니를 빼면서 제 살길만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지금도 형편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유명 정치인, 재벌, 유명 교회의 목사 등의 자녀들은 왜 그리 몸들이 부실한지 군대를 가지 못하고(?) 있다. 본인들은 갈려고 하는데도 몸이 도무지 말을 안들어 못 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여 당시 조정에서는 고종황제와 대신들이 회의를 거듭하였고 회의가 길어지자 일본의 하야시는 헌병들을 대동하여 회의장에 들어가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대신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직접 가부를 묻는 아주 불공한 태도로 위협을 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은 "무조건 불가하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데 반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적극찬성을 표하면서 통과된 것이다. 이들이 바로 을사오적(乙巳五賊)이다. 을사년의 다섯 도둑이란 뜻이 되겠다. 즉 나라를 훔친 엄청난 도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판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최익현, 유인석, 민종식, 신돌석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아직도 그 이름이 역사속에 쟁쟁히 남아 있다.

◎ 허울좋은 내선일체(內鮮一體)
〈한일합방〉을 성공시킨 일본은 그후 아예 노골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들이대고 1937년에 소위 '내선일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일본은 내(內)이고 바깥 나라를 외(外)로 표현하였는데 조선(朝鮮)을 뜻하는 선(鮮)을 붙여 '내선일체'라면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후 1940년대 이르러서는 창씨개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친일파가 등장, 정치권 인사가 아닌 지식인, 문인, 경찰 등이 동원되어 일본의 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고 돌아다니게 되었다  
급기야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하여 잠자는 사자인 미국의 코털을 뽑고 말았으며  일본은 이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한반도에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
결국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터지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의 승리로 한국은 해방이 되었다. 이 해방정국에서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저 기쁘기만 했다. 또 남들이 가져다 준 해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스스로 쟁취한 것처럼 착각도 하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요인들은 모두 개인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오는 수모를 겪어야했고 좌우익의 갈등으로 신탁통치의 시대를 맞이할 뻔했다. 이러한 혼란과 어수선한 정국에서 친일세력은 청산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군정에서 실력자로 발탁되기까지 하면서 역사는 뒷걸음을 쳤다. 북한은 철저히 친일파 숙청을 단행한 것에 반해 남한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불
러들여 자신의 세력 하에 두어 정통성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은 삼선개헌과 부정투표로 1960년 4.19 학생의거로 물러난다. 이것 역시 민중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곧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내각책임제로 출발하여 민주화 시대를 맞는 듯 하였으나 이 또한 박정희의 군사정변에 정권을 넘겨주고 만다.

◎ 정통성이 없었던 정권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79년 궁정동 안가에서 심수봉의 기타소리를 들으며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기까지 18년간 장기 군사정권의 시대를 펼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역시 일본 군인출신이고 다카끼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인지라 징용피해자나 정신대에 관심을 가질 위인이 아니었다. 박정희와 주변군인들은 더 이상 군사정권을 연장할 명분이 없자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에 혈안이 되었을 뿐이다.  
그 돌파구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란 미명하에 김종필과 일본 오히라 외상이 외교문서가 아닌 메모수준의 협약을 슬쩍 주고받아 현재까지도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당시 김종필은 "내가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체결시키고 만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였는
데 실제로 제2의 이완용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권에서 그는 지금까지 3김 중의 한 사람으로 득세하며 충청권 대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들이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망각증세가 심하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설 땅은 점점 줄어든 것이다. 계속 그런 인물들이 실세로 자리하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한국 내에선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실효도 없었다.

◎ 캘리포니아 주의 「헤이든법」
지난 1999년 7월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특이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징용피해에 대한 배상을 가능하게 하는 징용배상특별법으로 발의자인 탐 헤이든의 이름을 딴 「헤이든법」이 곧 그것이다.
이 법은 캘리포니아 주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민사소송법 354.6조로 법제화되었다. 주요 내용은 1929-1945년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과 관련된 기업에 의한 징용 피해자가 2010년까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기업들에게 징용을 당한 미군 포로들을 비롯한 한인 징용 피해자들도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다.
이에 지난 1999년 10월 4일 한인 정재원(81세) 씨가 원고가 되어 일본의 오노다(현 다이헤이요)시멘트 회사를 제소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 그동안 피고측은 일본과 연합국의 관계에 있어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배상의무가 이미 소멸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미국 국무부의 입장도 특별법이 외교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유사한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지난 1월 15일 캘리포니아 주의 항소법원은 피해자 정재원 씨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원고측 청구내용은 정치적 사안이 아니며 캘리포니아 주의 「헤이든법」은 연방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결국 3년 반 정도의 긴 시간을 끈 이 소송은 1심인 LA 지방법원에서 계속 심리가 열리게 되었고 9월중에 1차 판결이 날 전망이다. 이로써 일본 및 일본기업에 의해 저질러진 강제노역 행위에 대한 소송의 물꼬가 트이게 된 것이다.

◎ 뜻 있는 한인들이 더 나서야
현재 이 소송은 신혜원 변호사, 한태호 변호사, 정의회복위원회 정연진 위원장 등이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또 이들과 함께 유태인 학살 관련 재판으로 명망있는 배리 피셔, 폴란드 대통령의 명예훈장을 받은 마이클 하우스펠트, 클린턴 정부의 법무 차관보를 지낸 빌 랜리 등이 공동변호인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피고측인 일본의 변호사들도 쟁쟁한 로펌의 호화군단들로 포진하고 있다. 일본측 회사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이 소송을 연방법정으로 이관하려하는 한편 소송 기각 요청 등 소송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한 법적인 실무 공방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나 만약 이 소송이 연방법원으로 이관되었다면 소송이 낙관적으로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시애틀과 필라델피아에서 제기된 비슷한 케이스의 소송이 연방법원으로 가서 모두 패소했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을 상대로 한 29개의 소송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재원 씨 케이스는 한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관련 신혜원 변호사는 "한번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한 부분을 처음으로, 그것도 법적인 절차를 밟아 정당하게 짚고 넘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상징성이 있는 이 재판이 비록 당장 실효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학술적인 자료로 남아 후세에 역사를 증언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본다"며 최선을 다해 소송에 임할 뜻을 밝혔다.
이민 100백주년에 내려진 '헤이든법이 연방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므로 심리를 계속하라'는 판결이 정재원 씨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강제 노역 피해자들에게도 축하의 시그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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