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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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진실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21.10.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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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모 발행인

조선왕조의 사대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

조선왕조실록은 탁월한 역사 기록이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중국의 역사기록에 구애받는 ‘사대사관’에 추종하므로 고조선 후기를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왜곡해 기록했다. 이런 역사 기록의 왜곡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 세력과의 수차례 전쟁에서 왕궁도서관에 소장한 역사서들을 빼앗기거나 불타는 비운을 겪으면서 상고시대와 고대의 귀중한 역사서를 대부분 잃은 탓이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강점이 시작되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1922~1938)가 조선사를 새로 펴낸 이후, 식민사관 추종 역사학자들은 “한국에는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단기간의 금석병용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시대를 국가가 아닌 신화시대로 설정한 조선총독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견해로 보인다. 고구려 이전 4천년 상고시대 역사를 신화로 치부해 한국역사를 2천년으로 왜곡해 식민통치의 고착화를 시도한 것이 일제의 ‘식민사관’이고, 광복이후 오늘날까지도 식민사관에 추종하는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구태의 악행을 반복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종말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21세기에 국가 융성기를 맞은 한국은 조선시대의 사대사관과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에 대한 역사 연구는 크게 변화해 정리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단군사료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심백강)이 2001년 간행한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에서 중요한 몇 줄 기록을 발췌했다.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맨 처음 천명을 받은 임금이다.”(태조실록 권1)
“단군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다.”(태종실록 권23)
“단군은 조선의 시조이다.”(세종실록 권75)
“단군은 당요와 함께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스스로 조선이라 하였다.”(세종실록 권29)
        *당요 :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BC2333년 추정)에 조선 건국
“우리 동방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모두 1천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태종실록권10)
“전조선의 왕은 단군(檀君)이고, 후조선의 왕은 기자(箕子)이다.”(세조실록 권3)
“우리 동방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정조실록 권5)
“옛날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단군이 맨 먼저 출현하여 예의와 겸양의 풍속이 형성되게 되었다.”(고종실록 권34)
 

세종7년 평양에 건립한 단군사당

단군에 대한 세종대왕의 생각이 드러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세종 7년(1425년) 9월 25일에 평양에 건립한 단군사당’의 기사이다. 세종 즉위 당시보다 3,751년 전 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을 국조(國祖)로 인식하고, 단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이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건립된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몰락이후 최초의 일이다. 더욱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조선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를 단군으로 제도화하는 결정은 임금으로서도 확고한 신념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단군고기’는 단군의 출생, 결혼과 가정, 건국과 역년, 통치영역 등을 상세히 다룸으로써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제5대 문종임금 때 편찬된 동국병감에서도 당시에 고조선은 위만조선을 의미했고 중국사서에서 몇 마디로 표현된 기자조선이 전부였다. 단군이란 존호는 알지 못했고 전설이나 신화처럼 중국사서의 기록을 옮겨온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에 의존해서 국왕이 단군 사당을 건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대왕은 ‘단군세기’를 통해서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의 역사’로, 그리고 ‘단군을 국조’로 확신했을 것이다. '단군세기'를 편찬한 이암은 고려 공민왕 시절 수문하시중을 지낸 사람으로, 이암의 손자 이원이 세종 즉위 시기에 우의정이 되고 종묘에 나아가 세종임금의 즉위 신고를 대행했다. 이원이 바친 ‘단군세기’를 읽은 세종대왕은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고 평양에 단군사당을 건립했을 것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역사적 진실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종실록과 세조실록의 ‘기자조선’ 기록은 중국 사마천의 사기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조선 역사를 편찬한 사대사관의 산물이다.

사마천은 사기<송미자세가>에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사실무근의 허구로서 이후 대대로 논란의 씨앗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 어디인가는 논외로 하고, 과연 ‘기자’는 어떤 인물인가?

중국의 역사시대는 하, 상, 주에 이어 춘추전국시대로 이어진다. 두 번째 상나라는 수도가 은(현재의 안양현)이어서 은나라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BC 1600년에 동이족이 주도하는 상나라가 화하족이 주도해 온 하나라를 정벌하고 550년 동안 중국의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
 
BC 1046년에 상나라 주(紂)왕이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주나라 무왕이 동쪽으로 진격하여 목야에서 전투를 벌여 상을 멸망시켰다. 주(紂)왕에게 ‘미자’라는 이복형이 있었는데 기자(箕子)는 대 학자로서 미자의 스승이었다. 상나라의 국운이 꺼져가는 시기에 기자는 제자인 미자에게 "모시던 왕이 잘못하여 망하게 되었으니 기자 자신은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 그러나 미자는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하라"고 권유한다.
 
‘서경’에서 주 무왕과 기자가 함께 언급된 것은 ‘무성’과 ‘홍범’이다. ‘무성’편에는 "주 무왕이 상나라에 이긴 뒤 제사를 지내고 제후들의 공을 치하하고 붙잡힌 상나라의 기자를 풀어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홍범’편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치국의 도를 물으니 기자가 홍범으로 대답하며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주 무왕의 행적 어디에도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미자지명>에는 주나라가 새로 제후를 임명할 때 무왕의 아들인 성왕이 미자를 송나라의 제후로 봉하는 내용인데 기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의 주석에 "양나라 몽현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몽현은 송의 도읍지인 ‘상구’지역으로 미자의 분봉지이므로 기자가 주나라 시대에도 미자의 분봉지에서 관계를 지속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후로 봉했다’는 사기의 기록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찍이 주 무왕이 직접 찾아가 ‘치국의 도’를 물을 정도의 중요 인물인 기자를 제후로 봉한 기록이 ‘서경’에서 누락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후대에 사기 <송미자세가>에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 라는 돌출 기록은 한 무제가 ‘위만’을 멸한 후 그 지역의 연고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역사 조작’에 불과하다.
 
한편 이암의 ‘단군세기’에는 “25세 솔나 단군, 정해 37년(BC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살면서 사람들의 왕래를 사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연대의 오차는 있으나, ‘상나라가 망하고 물러나서 숨어사는 기자의 모습’을 정확히 기록하여 ‘서경’의 기록과 상통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의 증언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없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자(箕子)의 동래(東來)’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라 우왕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夏)라 하고 ‘수두’의 교를 행하였다. 그리고 단군 왕검이 부루태자를 통해 보낸 신서를 도산에서 받아 ‘홍범구주’라 하며 신봉하였다. 그 후 하나라가 수백 년 만에 망하고 그 뒤를 상나라가 이어서 또 수백 년간 지속하다가 망하였다. 그를 이어 주나라가 흥하여서는 주 무왕이 홍범구주를 배척하였으므로, 은의 왕족인 기자가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는 조선으로 도망쳐 왔는데, 상서(書經)의 홍범편이 이에 관한 내용이다.”

“이전의 역사서에서는 단군 왕검 1220년 후(기원전1114년)에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箕子王朝鮮)’라고 기재해 놓았으나, 기자는 그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년(대부여 보을단군 19년)에 이르러서 그 자손 기후(箕詡)가 비로소 불조선(번조선)의 왕이 되었으니, 이제 사실에 따라서 조선상고사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삭제한다.”
 

‘단기고사’가 말하는 기자조선(奇子朝鮮)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대진국(발해) 대조영 황제가 그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명하여 편찬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사서이다. 대야발은 13년간 삼한 전역과 돌궐에 이르기까지 답사해 ‘단기고사’를 편찬했다. 여기서 말하는 기자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단군조선 21대 소태단군 치세 말에 ‘정변’이 일어난다. 소태단군께서 나이 많아 상장군 서우여를 살수지역 100리를 통치하는 ‘기수(奇首)’로 임명하여 대업을 승계토록 추진하였으나, 우현왕 색불루가 이에 반대하고 주위의 세력과 수렵족 수천명을 모아 부여의 신궁에서 스스로 즉위하였다. 소태단군은 할 수 없이 옥책과 국보를 내주었고 서우여도 서민으로 폐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정변이다.
 
BC 1285년에 색불루가 22대 단군으로 즉위하자 이번에는 상장군 서우여가 군대를 일으켰다. 색불루단군이 직접 토벌에 나섰으나 승패 없이 화해가 이루어졌다. 색불루단군이 서우여에게 삼조선의 하나인 ‘번조선’의 번한을 제안하고 받아들여지자 서우여를 ‘번한’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서우여의 ‘번조선’을 ‘단기고사’(대야발 편저)에서는 ‘기자조선’으로 따로 분류하고 있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는 이름은 소태단군이 서우여를 신임하여 살수 땅에 봉하면서 내린 기수(奇首)의 칭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정변으로 부여신궁에서 스스로 단군에 즉위한 색불루에 비하여 서우여의 ‘기자조선’이 소태단군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역사인식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나 후기 단군조선에서 ‘진, 막, 번조선’의 삼조선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색불루단군은 진조선을 직할통치하고 삼조선 전체를 통치하는 대단군이므로, ‘기자조선’은 삼조선의 하나인 번조선의 별칭으로 인식하는 것이 좋겠다.
 
기원전 323년(대부여 보을단군 19년)에 이르러서 ‘기자’의 후손 기후(箕詡)가 비로소 번조선의 왕이 되었고, 기욱-기석-기윤-기비-기준으로 승계되었다. 기준은 번조선의 마지막 번한으로 BC 194년에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나라(번조선)를 빼앗긴 사람이다.

번조선을 차지한 위만은 3대 86년간 번조선을 통치한 후, 한무제의 침공으로 BC108년 위만조선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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