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어떻게 체결됐나>
상태바
<한일협정 어떻게 체결됐나>
  • 연합뉴스
  • 승인 2005.01.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합뉴스 2005-01-17 10:17]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13년 8개월을 끌었던 한일회담은 1965년 6월22일 당시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도쿄의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직면한 `경제문제 해결'이라는 한국의 필요와 `식민지 피해청산'의 부채를 경제협력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해소하려는 일본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난산 그 자체였다.

당초 우리 정부는 전승국 자격으로서 전쟁배상 요구를 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으려 했다.

이를 위해 1951년 4월16일 당시 외무부 내에 `대일강화회의 준비회의'를 설치하고 같은 해 7월18일 서명국 자격 요청안을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 후 한달이 채 못된 8월13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의 서명국 자격이 배제됐다.

대신 강화조약 4조 B항에 "일본은 한국에서 미 군정 또는 그 지령에 의한 일본 국민의 재산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는 조항이 삽입됐다.

이 조항은 미군의 한반도 진주 직후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압류해 미 군정에 귀속시켰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재산은 한국정부에 귀속됐으며 4조 B항으로 그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된 것.

따라서 그 후 진행된 한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에서 비롯된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의 청산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한일회담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20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중재하에 도쿄에서 처음으로 일본과 공식 대좌를 통해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

그러나 1952년 2월부터 2개월여간 진행된 제1차 한일회담은 우리측이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을 제시한데 대해 일본측은 일본인의 한국내 사유재산에 대해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이른 바 `역청구권'을 주장하면서 결렬됐다.

이후 53년 봄과 가을에 열린 제2차, 제3차 회담에서 일본의 `역청구권'은 불가하다는 미 국무성의 유권해석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고, 3차회담에서 `일제 통치가 조선에 기여했다'는 그 유명한 구보타 망언이 불거지면서 한일회담은 무려 4년간이나 표류하게 된다.

1958년 일본에 기시(岸) 내각이 들어서면서 그 해 4월부터 2년간 제4차 회담이 열리고 일본 측도 `역청구권'을 취소하지만 회담은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또 1960년 10월 우리나라에서 장 면 내각과 일본의 이께다 내각이 의욕적으로 제5차 회담을 재개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회담이 중단된다.

진전을 이룬 것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 때로 제6차 회담때인 1962년 11월에 한일간에 정치적 타결을 시도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 회담간 `김-오히라 메모'가 나온다.

청구권 액수를 놓고 한국이 7억달러를 요구한 데 반해 일본은 7천만달러가 상한 선이라고 주장하면서 회담이 교착된 상황에서 열린 `김-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금액 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합의해 회담의 돌파 구를 텄다.

이 금액은 추후 협상과정에서 상업차관 부분만 `3억달러'로 최종 조정됐다.

그러나 회담을 성사시킨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 자금 3억달러에 민족의 자존심 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박 정권은 당시 `김-오히라 메모'를 포함한 회담 진전 과정을 비밀에 부쳐 `6.3사태'라는 격렬한 회담 반대시위를 초래했으며 1964년 4월에는 `굴욕회담'과 `구걸외교'를 규탄하는 데모가 격화돼 그 후 1965년 제7차회담은 위수령과 계엄령속에서 열려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한일협정 결과와 관련, 한편에서는 `경제협력자금'(청구권자금)이라는 종자돈을 받아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 평가가 있는가 하 면 다른 한편에서는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켰 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한일협정은 크게는 한일합방조약의 무효화 시점 시비나 일제 강제동원 피 해자 보상 문제서부터, 작게는 일본군위안부, 사할린동포 문제, 대한민국 정부의 한 반도 유일합법 정부 조항 논란, 문화재 반환, 재일교포 법적 지위, 독도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한일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미해결 현안들을 숙 제로 남겼다는 지적이다.

이 가운데 한일협정이 안고 있는 가장 뼈아픈 결함은 한일합방이 `원천무효'임 을 명시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의 식민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조차 받아내지 못한 채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은 바로 한일 합방 자체가 불법이었음을 관철시키지 못한 결과였으며, 일본 정치가들의 반복되는 과거사 망언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일협정에 대해 이처럼 가혹한 비판이 뒤따르고 있는 데는 일본의 책임이 크다.

일본은 회담 초기부터 `역청구론'을 내놓는 가 하면 회담 대표가 망언을 일삼는 등 과거 청산의지가 아예 없었다는 점에서 협상은 시종일관 공전과 난항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 측은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거부하고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을 관철시키려 했고 일정 정도 이를 달성하는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일본은 같은 전범국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전쟁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자초하고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사죄와 보상요구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것이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일관계 또한 양국 정상간의 미래지향의 합의에도 불구, 진정한 화해와 공통의 역사인식을 공유하지 못한 채 갈등과 대립은 여전히 잠복상태로 남아있다.

이처럼 매듭이 풀어지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잘못된' 한일협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