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땅을 붓으로 되찾지 못한다면 총으로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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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땅을 붓으로 되찾지 못한다면 총으로 찾자
  • 중앙일보
  • 승인 2003.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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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3-03-03 () A28면 1475자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0)  
빼앗긴 땅을 붓으로 되찾지 못한다면 총으로 찾자
-김학철
모국어의 지평은 넓다. 일제가 나라의 땅을 빼앗고 말과 글을 빼앗을 때 말보다는 총으로 되찾겠다고 싸움터로 달려간 젊은이가 있었다. 손에는 총을 들었으나 가슴에는 붓을 세워 모국어의 혼불을 쉬지 않고 밝혔으니 그가 조선의용군 소설가 김학철(金學鐵)이다.
김학철의 본명은 홍성걸(洪性杰)이지만 항일투쟁을 위해 가명을 썼던 것을 끝내 자기 이름으로 썼다. 그는 1916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열세살 때 서울 외가의 도움으로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시절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충격을 받았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빼앗긴 땅을 총으로 찾겠다고 결심한다.
보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열아홉살 나이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스무살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된다. 이때 김구(金九)와도 만난다. 다음에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인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교관이던 김두봉.석정 등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빠진다.
무한 전투에서 사살한 적병의 배낭에서 한글 책자가 나왔는데 '발가락이 닮았다'는 단편이 들어있었다.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비록 일본군으로 나갔지만 싸움터에서 모국어를 읽던 그 젊은이는 누구였을까? 김학철은 그 소설을 읽으며 엇갈리는 민족의 운명을 마음으로 아파한다.
싸움터에서 언제나 앞장서던 공산당원 의용군 김학철은 41년 태행산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져 일본군 포로가 된다.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44년 상하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언도를 받고 끌려온 송지영을 만나는 인연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에 다시 기름을 붓는다. 총상 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해 수감 3년6개월 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학처럼 외다리로 선다.
조국 광복과 함께 맥아더 사령부의 석방 명령으로 손지영과 함께 서울로 와서 건설주보에 단편 '지네'를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다가 47년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코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간다.
노동신문 기자, 인민군신문 주필을 역임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던 김학철은 50년 10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갔다가 옌볜(延邊)에 정착, 장편 '해란강아 말하라' 등 소설 쓰기에 전념하던 중 반동분자로 숙청돼 24년간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60년대엔 홍위병에게 미발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들켜 창춘(長春)에서 10년간 복역한다.
나는 94년 김학철옹이 KBS 해외동포상을 타러 서울에 왔을 때 처음 만났다. 이후 그가 서울에 오거나, 혹은 내가 옌볜에 갈 때마다 그를 꼭 찾아뵈었던 것은 눈덮인 백두산같은 차고 맑은 정신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옹은 2001년 9월 5일부터 스무하루 동안 곡기를 끊은 끝에 '내땅 찾기 내 말 찾기'의 85년 대장정을 마감한다. 유언대로 화장해 두만강에 종이배를 띄웠다. 우편 주소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이었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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