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망명객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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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망명객 이유진
  • 이광규
  • 승인 2004.12.27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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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는 윤이상 선생과 같이 세기에 드물게 나오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듯이 이유진이라는 기인도 있다. 이유진이란 사람은 한국이 근대화라는 과정을 겪던 20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조건과 프랑스라는 자유로운 문화 환경 그리고 그의 강한 개성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시대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이유진선생을 만난 것은 아마 1963년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유학했던 시절 두 번의 여름방학 동안 파리에 불어를 배우러 갔을 때였다.  그와 사귄 시간은 짧았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 미국보다 프랑스로 유학 온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며, 과거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이며,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 겠다는 의지며, 젊은 우리는 뜻이 맞아 며칠 밤을 세워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그는 드골 장군에게 깊이 빠져 있었는지 드골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특히 그의 부인 이사빈선생이 비엔나에 유학을 왔다가 파리로 가서 이선생과 결혼을 하였기에 더욱  관심을 가졌었다.

사람의 인연은 참 이상한 것이기도 하다. 이선생과 헤어지고 몇년 뒤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비행기 내의 “모닝캄”이라는 잡지에서 우연히 이선생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놀랍게도 그가 파리의 북한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그러나 그 기사는 틀림없는 이유진에 관한 것이었다. 그 후 파리에서 왔다는 사람마다 이선생에 관하여 물었으나 시원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파리를 몇번 들르면서 대사관에 그의 주소를 물었으나 알려주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995년. 그때도 역시 대사관에 그의 주소를 물었던 바, 대사관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주어 연락을 하였더니 그는 바로 달려왔다. 어언 30년만에 만난 것이다. 그의 용모에 기백은 여전하였으나 세상의 풍파에 지친 흔적이 완연하였다. 어찌 하룻밤이란 짧은 시간에 30년의 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간단한 집안 안부로 다시 만남을 아쉽게 보내고 헤어졌다.

지난달 출판된“빠리망명객 이유진의 삶과 꿈”이라는 그의 자서전은 마치 지난 30년 세월이 어떠하였는가를 나에게 말하려 한 것 같이 느껴졌다. 책을 받은 즉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세월을 지나왔다. 평범한 대학교수 생활을 한 나로서는 짐작도 못할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온 이선생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는 올바른 양심을 지키며 세상의 간교를 물리치고 속세의 탁류에 물들지 아니한 정의의 사나이다.

그는 비록 인생의 밑바닥에서 가난과 싸우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한 위인이었다. 그가 삶의 질곡에서 헤매였던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에서 정의의 외로움을 중국 고전과의 만남으로 극복하여 중국의 백가사상을 몸으로서 터득한 것이 부럽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의 철학을 배경으로 중국의 고전을 터득하여 동서양의 사상사를 통달하였으며 긴 인류의 역사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은 근세 서구문명을 비판하였고 그 서구문명을 모방하려고 애쓰는 한국의 가련한 모습을 조명하였다. 한국을 갈라놓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이론인가를 비판하였고 그 빈약한 이론을 최고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국의 지성이 얼마나 비천한가를 설명하였고 그것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를 비웃어 보였다.

그는 비록 오늘의 사회에서는 낙오자라는 평을 받을지 모르나 남북의 분단 논리에 눈이 어두운 한국인을 깨우치는 참으로 위대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의 눈으로는 파리의 망명객 이유진은 몽양의 몇배 되는 20세기 후반의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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