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안중근과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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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안중근과 헐버트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20.10.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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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모 발행인
이형모 발행인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한국과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서명하였다. 한일의정서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1905년 11월 총칼로 위협하며 오늘날 우리가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보호국임을 자처했다. 

2년 뒤 1907년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을 원천무효라고 세계만방에 선언하며 일본의 보호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그해 7월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다시 2년 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해 쓰러뜨렸다. 얼마 전까지 조선통감이고 조선 침략의 수괴였던 그를 한민족을 대신해서 처단한 것이다. 이 한발의 총성은 한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동아시아를 진동시켰다.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안중근이 뤼순(旅順)감옥으로 이송된 지 달포가 지나서다. 취조실 한편에 난로가 놓였지만 마루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안중근은 코끝이 시렸다. 일본경찰에서 꽤 높은 경시 계급장을 단 사카이(境喜明)도 손이 곱은지 틈만 나면 손가락을 호호 불어댔다.

사카이는 끊임없이 안중근의 거사에 배후를 캐내려고 전방위적 심문을 이어갔다. 사카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들이댔다. “미국 사람 ‘하루바토’를 아는가?” 안중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자가 왜 갑자기 헐버트(Homer Hulbert)의 이름을 꺼내는가? 안중근이 대답에 뜸을 들이자 사카이가 “하루바토를 만난 적이 있소, 없소?”라고 다그쳤다. 안중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1909년 12월 2일의 일이다.(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이 담긴 통감부 기밀문서)

왜 안중근이 한 이방인에게 예를 갖추어 최상의 존경을 표했을까? 둘은 잘 아는 사이였을까? 헐버트는 과연 안중근에게, 그리고 한민족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고종황제의 특사 헐버트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가 되기 위해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책임감으로 조선 말글을 공부했으나 한글을 접하자마자 한글에 매료되었고, 배운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다. 1889년 조선 말글의 우수성에 대한 최초의 글 ‘조선어’를 <뉴욕 트리뷴>지에 기고했고,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1893년 배재학당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되고,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을 도왔다.

1895년 일본군이 심야에 궁궐에 진입해 민비를 살해한 직후, 미국인 언더우드, 애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1905년 고종황제의 대미 특사로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에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1907년 5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를 방문해 한국인 3인 특사를 지원했고,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했다.  

헤이그 특사로 활약한 탓에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9년 가사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상해 소재 독일은행에 예치된 고종황제의 내탕금 인출을 위한 위임장을 받았다. 독일은행을 찾아가 인출을 요구했으나 이미 이완용과 짜고 일본 통감부가 불법 인출해 간 뒤였다.

1903년에는 YMCA창립준비위원장 및 총회의장으로 한국YMCA 창립을 선포했다. 1903년 조선왕조 역사서 <대동기년>을 출간했고, 1905년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했다. 1906년 한국의 역사, 문화를 집대성한 <대한제국의 종말 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험난한 시대상황을 함께 겪은 동시대인으로서 여기까지 기록된 헐버트의 우국충정과 활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카이 경시가 “미국인 하루바토를 아는가?”라고 심문했을 때,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헐버트

그 이후 헐버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프랑스에서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4년 미국 전역 220곳을 방문해 강연하며 식어가는 한국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렸다. 1919년 이후 1945년까지 ‘한국친우회’와 ‘구미위원부’ 등 한국 독립운동단체에서 중심 연사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을 맞아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국빈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했으나, 86살 노구로 긴 항해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서거했다. 정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에 안장했다. 한국으로 출발하면서 그는 AP 기자에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한국인이 기억하는 헐버트

대학을 졸업하고 1886년 23살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이후, 그의 삶은 한국과 한국인 공동체 속에 온전히 담겼다. 63년 동안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 한 헐버트 박사의 삶은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로 점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 헐버트에게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기려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4년 10월 9일 헐버트에게 한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2015년 10월 7일,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하여 영원한 한민족의 노래로 발전케 한 공로를 인정하여 헐버트에게 제1회 ‘서울아리랑 상’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1906년 역사서 <대한제국의 종말> 헌사에서 “비방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 라고 썼다.

한민족은 반드시 부활해서 독립 국가를 쟁취할 것이라는 ‘대한 독립’의 열망과 신념을 피력했다. 그리고 헐버트는 끝내 한국이 독립하는 환희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 맞이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를 기억한다. 

  
- 김동진 저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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