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한글로 풀어 쓴 역사 이야기’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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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한글로 풀어 쓴 역사 이야기’ 특별전
  • 이현수 기자
  • 승인 2020.10.0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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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벽을 넘어 우리 앞에 나온 역사 이야기…한글로 번역한 역사자료 중 4가지 주제 선정

내년 3월까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2실에서 전시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574돌 한글날을 맞아 테마전 ‘한글로 풀어 쓴 역사 이야기’를  개최한다. 

이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04년부터 추진하는 ‘역사자료총서’ 사업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자료 중 4가지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내 청소년을 비롯한 대중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기획됐다.  

역사자료는 시대를 읽어내는 중요한 사료이지만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어 전문 연구자 외에는 접근이 쉽지 않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2020년부터 ‘청소년 문해력 증강사업’을 추진해 한자로 된 역사자료를 번역해 청소년과 대중이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콘텐츠로 제작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는 이 사업의 일환이다.  

전시는 4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1부는 조선시대 재산상속 문서인 분재기, 2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영조와 정조의 기억과 평가, 3부는 정조가 정적(政敵) 심환지에게 보낸 은밀한 편지, 4부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한글 소설이다. 

어머니 이씨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분재기(조선, 1775년). 1775년 1월 22일 김팔공의 아내 이씨가 4남 1녀의 자식들이 재산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염려해 생전에 재산을 나눠주며 작성한 문서이다. 제사를 지내는 봉사조를 정한 후 첫째 ○○, 둘째 관선, 셋째 담재, 넷째 대성, 사위까지 차례로 재산을 나눠줬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어머니 이씨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분재기(조선, 1775년). 1775년 1월 22일 김팔공의 아내 이씨가 4남 1녀의 자식들이 재산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염려해 생전에 재산을 나눠주며 작성한 문서이다. 제사를 지내는 봉사조를 정한 후 첫째 ○○, 둘째 관선, 셋째 담재, 넷째 대성, 사위까지 차례로 재산을 나눠줬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1부: 한글로 풀어 쓴 조선시대 재산나누기 ‘나라의 법을 어긴 놀부’

놀부가 부모의 재산을 홀로 차지하고 동생 흥부를 내쫓은 건 조선시대에도 옳은 일이 아니었다. 이는 부모의 재산을 자녀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한 조선의 국법을 어긴 것이었다. 다만 17세기 이후 점차 제사를 맡는 맏아들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게 됐을 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6세기와 18세기의 분재기(조선시대 재산상속문서)는 그렇게 변화해가던 조선의 사회상을 전한다.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 묘지(조선, 1762년). 영조는 이 묘지문에서 사도세자가 무도(無道)하고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광이가 됐기 때문에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세손(정조)을 위해 폐했던 세자의 지위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 묘지는 1968년 사도세자의 옛 무덤인 영우원 터(현 동대문구 삼육서울병원 자리)에서 발굴돼, 정조 때 이장한 새 무덤인 현륭원에는 옮겨 묻히지 못했음이 확인됐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 묘지(조선, 1762년). 영조는 이 묘지문에서 사도세자가 무도(無道)하고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광이가 됐기 때문에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적었다. 그리고 세손(정조)을 위해 폐했던 세자의 지위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 묘지는 1968년 사도세자의 옛 무덤인 영우원 터(현 동대문구 삼육서울병원 자리)에서 발굴돼, 정조 때 이장한 새 무덤인 현륭원에는 옮겨 묻히지 못했음이 확인됐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2부: 한글로 풀어 쓴 사도세자 묘지명 ‘사도, 그 이름에 담긴 속뜻’

사도세자(1735~1762)의 죽음을 둘러싼 영조와 정조의 서로 다른 기억은 유물에 고스란히 남았다. 영조는 자신이 지은 사도세자 묘지명에서 그의 죽음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반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려 그의 뛰어난 자질을 드러내고자 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그대로 두고 간 영조의 묘지명, 영조와 정조가 각각 따로 만든 사도세자의 옥인(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한중만록’ 등이 전시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조선, 18세기 후반). 정조(재위:1776-1800)가 우의정 심환지(1730-1802)에게 보냈던 편지를 엮어 만든 서간첩이다. 18세기 정국의 축이었던 국왕과 고위 관료가 서로 다양한 문제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국정을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조선, 18세기 후반). 정조(재위:1776-1800)가 우의정 심환지(1730-1802)에게 보냈던 편지를 엮어 만든 서간첩이다. 18세기 정국의 축이었던 국왕과 고위 관료가 서로 다양한 문제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국정을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3부: 한글로 풀어 쓴 ‘정조의 은밀한 편지’

정조는 대중매체에서 흔히 개혁적이고 박학다식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가졌다. 그러나 정조는 필요할 때 신하와 은밀히 소통하며 국정을 운영했던 노련한 정치가였다.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우의정 심환지(1730~1802)에게 정조가 보냈던 편지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정조가 어떻게 심환지를 조정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정조와 심환지의‘대화방’을 들여다보듯 만든 영상을 통해 쉽게 풀어놓았다. 

허균(1569~1618)의 홍길동전. 17세기 조선시대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창작 한글 소설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서자여서 벼슬에 나갈 수 없었던 홍길동은 울분을 품고 집을 떠나 활빈당의 두령이 된다. 도술로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백성을 돕던 홍길동은 율도국으로 터를 옮겨 그곳의 왕이 된다. 신분 차별, 부패한 정치 등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반영된 이 소설에는 가혹한 현실에서 영웅의 활약을 바라던 사람들의 염원이 투영돼 있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허균(1569~1618)의 홍길동전. 17세기 조선시대 허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창작 한글 소설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서자여서 벼슬에 나갈 수 없었던 홍길동은 울분을 품고 집을 떠나 활빈당의 두령이 된다. 도술로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백성을 돕던 홍길동은 율도국으로 터를 옮겨 그곳의 왕이 된다. 신분 차별, 부패한 정치 등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반영된 이 소설에는 가혹한 현실에서 영웅의 활약을 바라던 사람들의 염원이 투영돼 있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4부: 한글소설로 보는 조선의 책방 ‘조선의 베스트셀러’

조선 후기에는 상업 출판인 방각본(坊刻本) 소설이 유행하고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크게 성행했다. 지금 우리가 웹툰, 웹소설, 유튜브를 즐기듯 조선 후기 사람들은 한글 소설을 찾았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박씨전’ 같은 고전 소설들을 책방에서 빌리고 돌려가며 읽었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의 필사본 ‘박씨전’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그 인기가 식지 않은 소설의 다양한 판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2실에서 내년 3월 3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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