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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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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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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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팍스 산이 마주 보이는 곳에 작은 모텔이 나온다. 벤쿠버로 가는 국도와 유코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있다. 록키산 줄기에서 발원된느 헤리테지강이 모텔 아래로 흐른다. 희고 깨끗한 모래와 자갈밭은 연어의 산란장이다.

가을철 테리팍스 산은 단풍으로 물든다. 높은 롭손산 봉우리엔 사철 흰 눈이 덮혀있다. 이 알핀지대가 병풍처럼 쟈스퍼로 뻗어나간다.

테리테지강의 최상류인 샤카이 산란장으로 내려갈 땐 조심해야 한다.

인간들의 숙박료인 달라도 내지 않고 동물들이 제멋대로 들어온다. 가끔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어미 흑곰이 나타난다. 연어를 잡아먹는 불청객 손님이다.
한밤중엔 늑대도 나타나니까. 붉은 연이인 샤카이와 곰, 주변의 수려한 풍광으로 성수기엔 방이 없다.

하지만 무스가 뿌려준 풀을 구걸하는 깊은 겨울엔 방이 텅텅 빈다. 유난히 눈송이가 휘날려 손님이 드물다. 태평양의 비먹은 저기압이 높은 록키산맥에 걸려 함박눈으로 변한다.

함박눈의 낭만에 젖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며칠간 와보면 하얀 공포를 알게 된다. 대로는 밤낮없이 하얀 공포가 휘뿌린다. 사방이 온통 하얗다. 수채화를 그리려는 사람은 슬프다. 그러다가 함박눈이 뚝 끊기고 밝은 달이 비추인다.

산란장 가까운 방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일체 차량이 끊기고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만 들린다. 모텔 입구엔 작은 주유소가 있으며 가로등이 밝게 빛난다. 때로는 응급구조를 바라는 길손이 쓰러질 듯이 달려온다. 눈속에 처박힌 차량신고다.

도저히 문이 안열려서 차량안에는 아이들이 남아있다. 여인네의 울부짖음 속에 허겁지겁 려간다. 항상 모래주머니와 체인, 삽등이 실려있으나 구조작업이란 지극히 어렵다.

눈길 속으로 구급차와 소방차가 달려오려면 상당 시간이 걸린다. 운좋게 구조해서 따뜻한 모텔방으로 옮겨 데리고 온다. 외진 곳에서 구급활동을 한 동양계 여인숙 주인이 환하게 웃는다.

가끔 자작나무, 소나무 장작을 TP천막 안에서 지핀다. 진한 향내가 좋다.
포장마차에 매달고 개척대열의 앞장을 섰던 큰 호롱불을 밝힌다. 철사줄로 단단하게 보호한 골동품이다.

진한 커피를 큰 커피잔에 가득 부어놓고 불꽃처럼 살다간 혁명가들을 읽는다. 더 밝은 미래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혁명가들. 등대불같은 혁명가가 암흑속에서 빛난다.

어느 시대에도 살벌한 폭력과 썩어버린 부패는 있었다. 눈보로가 칠때엔 두 번다시 자작나무 잎이 피어나지 않을 것같다. 자꾸만 눈보로가 치듯이.
바로 앞산에 있는 영원한 이름을 기념한 테리팍스가 그렇다. 혁명가 이상으로 희망이란 수채화를 그려주고 23세에 떠났다.

그는 B.C주의 코크트람에서 소년기를 보낸 꿈많은 청년이었다. 뜻아닌 암에 걸려 오른 발을 절단했다. 암이란 무서운 병마가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가는 걸 보고 암을 연구하고 개발 기금마련을 위해 마라톤을 뛰었다. 의학계의 혁명을 위하여.

동부의 대서양 연안인 뉴파운드랜드에서 서부 태평양인 고향을 향해 달렸다. 수십켤레의 왼쪽 신발과 의족을 갈아끼우며 1년이 넘게 뛰었다. 온 캐나다인의 성원과 사랑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엄청난 암 연구기금이 마련됐다. 한발씩 뛰는 발자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높은 록키산을 넘어 고향인 BC주를 내려다보는 산마루에서 심장이 멈추었다.

비록 숨쉬는게 끝났다 해도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인 암퇴치를 위한 기금마련을 해주었다. 혁명가의 불꽃같은 정신을 테리팍스도 뿌리고 갔다. 자신의 운명을 희망이란 수채화를 그리다 갔다.

다음해 봄이 오면 온통 뒤덮힌 하얀 공포도 물러가고 하느님께서 그리시는 수채화도 즐길 수 있게 된다. 희망의 수채화는 남아있다.

<캐나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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