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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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 김제완
  • 승인 2004.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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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언 <<장차 나희들 생활이 넉넉하면 어려운 그들을 힘껏 도와주라 designtimesp=19964>>
기자 윤운걸

일전에 기자는 연변민간문예가협회 고문겸 길림성 안도현작가협회 고문인 리룡득씨로부터 장장 7년째 불우 학생을 도와주고 노인들의 뒤바라지를 해 드리고 있는 한 한국인이 있는데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제의를 받았다.그의 소개에 따르면 김영삼(42살,남)씨는 몆년간 사재를 털어가면서 안도땅에서 불우가정 15호를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있고 오늘도 고급중학교 빈곤생 13명, 초급중학생 3명, 소학생과 대학생 5명에게 장학금을 지속적으로 지불하고 수백명 노인들에게 효도잔치를 베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왜 안도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1962년 5월에 서울에서 출생한 김영삼씨는 미국 트리니티대학을 수료하고 사회복리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뒤 현재 한국서울상록복리회사 경리사업을 맡고 있는데 안도현을 사랑하게 된데는 아버지의 영향이였다. 아버지 김생금씨는 워낙 금강산이 지척인 조선(원산)이 고향이였다.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면서 친지들과 갈라지게 되여 어망결에 남쪽으로 밀려나왔다가 왕래가 끊기는 바람에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었다.1980년 68세에 접어든 아버지는 북받쳐 오르는 혈육의 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제 때 자주 다니며 만났던 안도현의 친척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서 kbs사회교육방송에 의뢰해 이산가족을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5촌 친척을 찾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불행하게 1981년 5월에 5촌 친척도 만나보지 못하고 영영 저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영삼씨는 금방 고급중학교 3학년이였다.중, 한문이 철통같이 닫쳐져 있었던 상황이라 친척을 만날 엄두를 못내다가 10년이 지나 나이가 서른이 되고 가정도 갖게되고 보니 아버지의 생각이 북받쳐 올라 단연 안도땅을 밟았다. 비록 80년대초부터 방송을 통해 5촌 친척을 찾아 편지가 3,4차 오갔지만 정작 안도땅을 밟고보니 5촌 친척들도 이미 사망하고 아버지도 사망하니 사무치는 친척들의 그리움을 달랠 길 없던 차 한민족 한피줄인 동포사회를 돕기로 마음을 먹었다. 안도현 동포사회를 살펴보니 조선족마을은 무너지고 불우한 가정의 자녀들은 돈없어 공부를 못하고 노인들도 변변한 안식처가 없는 것을 자기 눈으로 목격한 그는 눈물이 앞을 가리여 도무지 떠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기자의 취재를 접수하면서도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여 창밖을 내다 보군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저러한 구설이 있어도 내 마음의 뜻 변하지 않았다
한국인도 그렀고 연변인도 그렀고 모든 것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살든지 문화교육 및 인성교유에 따라 감정과 생각하는 것이 다를수 있다고 그는 말하면서 이 몇 년간 안도땅을 전전하면서 늘 아버지의 생전부탁을 잊지 않고 마음에 아로 새겼다.아버지는 세상을 뜰 때 김영삼씨 등 세 아들에게 <<그곳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동포들이 살고 있는데 장차 너희들이 생활이 넉넉하게 되면 자주 찾아가서 어려운 그들을 힘껏 도와라 designtimesp=19977>>고 간곡히 유언했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김영삼씨의 좌우명이였다. 그래서 그는 1997년부터 안도현 노인들이 생활상에서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직접보게 된 후에 8.15노인절마다 꼭꼭 찾아가 효도잔치를 베풀었고 매번 찾아 갈 때마다 버스를 세내여 전체 노인들을 모시고 현성에 가서 목욕도 시켜 드리고 하루를 마음껏 즐기도록 2,3천위안을 내놓았다.

또 3.8국제부녀절에 노인 활동실이 없어 이집저집 옮겨 다니면서 활동을 하고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노인협회책임자에게 속한 시일내에 마땅한 집 한채를 장만하라고 신신 당부하고 돌아갔다.협회에서는 55평방메터되는 새 벽돌 기와집을 사고 노인들이 활동하기에 알맞게 살뜰히 수리까지 하고 소식을 띄우자 김영삼씨는 집값에 수리비까지 포함해 2만2천 위안현금을 갖고 부랴부랴 찾아왔다.어디 그뿐인가, 김영삼씨는 조선족 학교들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7년전부터 안도현 제2중학교 17명 빈곤생들이 돈없어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을 목격하고 매달 매인당 100위안의 장학금을 지불해 학교를 졸업하게 했고 해마다 졸업을 앞둔 빈곤생 6명씩 선택해 학교를 졸업하게 했고 해마다 졸업을 앞둔 빈곤생 6명씩 선택하여 3명당 세집 하나에 보모까지 배치해 줘 시름없이 공부를 마치게 했는가하면 수혜 학생들을 조직해 백두산관광, 연변과기대견학, 북경견학도 시켜 주었으며 또 이 몇년래 무려 100여차나 빈곤생 가정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 몇년 사이에 이러저러한 구설도 떠돌았다.<<저사람이 간첩이 아니냐? designtimesp=19982>><<한국사람이기에 돈도있네 designtimesp=19983>><<저 사람이 종교인이 아니냐? designtimesp=19984>>등등의 구설이 떠돌 때마다 그는 마음의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동포의 정으로 대하고 또 서로 교육받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구설이 떠돌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속의 동포정이라는 이 불씨는 점점 더 타오르기만 했다.그래서 이제는 안도현 시민들은 물론 정부관원들도 점차적으로 김연삼씨란 이 존재가 어떤 존재임을 알고 상당히 지지하고 고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과 조선족 서로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보지 말아야 전쟁의 피해,망국의 설음을 안은 것은 오직 한반도이고 중국 조선족이다.

이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이제는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민족사회를 구축하고 민족의 얼을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그는 얘기했다.그제날 어떤 한국인들이 돈 좀 갖고 와서떠들썩 했기 때문에 동포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수 있었고 또 조선족은 한국인을 돈주머니로만 생각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데 대비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세상에 돈 많아서 바가지로 퍼 주는 사람은 없다. 오직 동포의 정,인간의 정으로 도와 주는 것이다.도와 주는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하루속히 지팽이를 짚고 일어 나게 하자는 것이고 일어나면 또 이 사회를 도와 나서게끔 하자는 것이다. 코리안드림으로 자기도 적지않은 현지인들을 알선해 한국에 보냈는데 보낼 때 마다 꼭 5년정도 있고 반드시 돌아와 부모처자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라고 당부하고 그사이에 내가 안도현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아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자에게 이제 아버지의 유언대로 안도현을 내가 사랑하는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2005년 새해에는 안도땅에 복지원을 세우고 불우한 이웃,노인들을 더 잘 사랑하고 모시겠다고 했다.

여기에서 안도현 서광노인학교 교장 최채봉씨의 말로 마무리 짓는다<<그 언제나 입고 다니는 옷은 한 본새의 수수한 색 낡은 양복 아니면 산지 몇해되는 쟘바,신도 늘 한 켤레의 색바랜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해마다 노인들과 빈곤한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10만위안이라도 아끼지 않는 것이 김영삼씨이다. designtimesp=19991>>

2004,11,29일 보냄 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
주소;중국길림성연길시북산가단녕거리35-2-2, 흑룡강신문 연변지사 주임기자 윤운걸 ,전화;0086-433-2552832,핸드폰;1394439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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