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소식>우리들의 자화상 ‘구노 오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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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소식>우리들의 자화상 ‘구노 오크만’
  • 임용위
  • 승인 2004.11.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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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도 울고 관객도 울어버린 ‘굿나잇코리아’
이 글은 오는 26일 대사관 강당에서 앙콜 공연되는 모노드라마 ‘굿나잇코리아(임용위 작, 일감스님 연출)’에서 조연출을 맡은 멕시코 한인동포 김성정씨의 글입니다. 재외동포사회 역사상 처음으로 창작극으로 공연돼 호평받은 지난달(26일부터 3일간) 한인문화원 공연의 연극후감을 소개합니다.

개미가 코끼리에게 한 말인가? 연극 “굿나잇 코리아”가 그랬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많이 힘들었다. 연극 전용 무대는 자금 관계상 꿈도 꾸어 보지 못했고, 조명, 음악, 무대장치, 홍보, 의상, 소품, 분장 등은 모두 전문가가 아닌 관심 있는 아마추어들과 관심도 없는 아마추어들이 직접 준비를 하고 진행을 해야 했다. 심지어 연출도 반야 보리사 주지스님이신 일감 스님께서 맡으셨다. 일감 스님께서 연극을 구경이야 하셨겠지만 무대에 올라가 보기라도 했을는지……
극본과 배우만이 전문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극계에 얼굴 한 번 내밀어 본 적도 없는 아마추어이고 한인 이민 100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단 한번도 교포사회에서 시도 되어 보지 못한 연극이었기에 처음은 힘들구나 하는 탄식을 절로 나오게 만든 멕시코 교민사회 최초의 연극 모노드라마 “굿나잇 코리아”. 그래서 연극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그 동안 고생했던 모든 출연진과 가까이서 지켜 보았던 모든 이들은 눈시울이 붉어짐을 어찌하기 힘들었다.
힘들고 실수했던 모든 자세한 내용은 그 동안 고생하신 스탭분들께서 별도로 기록으로 남겨
놓으실 것을 기대하며 연극을 보며 느끼고 생각나는 단편을 기록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필자/김성정

I.

“본디의 참모습. 본체” 국어사전에 나온 정체성을 말 할 때의 정체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본디의 참모습이란 무엇인가? 구노 오크만처럼 외양은 동양인이나 속은 멕시칸일 경우 이
사람의 본디 참모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저 자신이 멕시칸인 줄로만 알고 있던 구
노 오크만에게, 동양인의 외모가 외면만이 아닌 내면의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구노 오크만은 자기 본디의 참모습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일까?
한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민2세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
이 외국에서 태어나 그곳 교육을 받고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 부딪힐 수 밖에 없
는 정체성의 문제.
특히나 연극의 주인공처럼 불우한 환경에 외모마저 동양인이기에 천대와 멸시를 더 받아야
하는 처지라면 정체성의 문제는 자기 삶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 될 정도로 심각해 질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딴 섬처럼, 멕시코라는 나라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의 피와
외모를 가진 멕시칸 구노 오크만.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더욱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구노
오크만에게 정체성은 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인가?

II.

12세가 될 때까지 자기가 한국인임을 모르고 계부와 동네 또래들에게 멸시와 천대만을 받
고 자란 구노 오크만. 동네또래들이 자기를 치노라고 부르며 놀려도 그게 조롱이라는 것도
모르고 심지어 지금의 멕시칸 아버지가 계부인 것도 몰랐던 구노 오크만에게 그의 엄마는
그가 멕시칸이 아니고 꼬레아노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구노의 곁을 떠난다.
엄마가 떠난 후 계부의 학대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구노는 계부에게서 도망쳐 나와 멕시코
시티로 오나 배우지 못한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매춘을 하
는 밑바닥 생활일 수 밖에 없었다. 마약에 취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구노는 고객의 지갑
을 훔치게 되고 그 후로 소매치기로서 청소년기를 보내지만 결국 법의 심판을 받기에 이른
다.
경찰서에서의 심문과정과 교도소 생활에서 자기가 한국인임을 확실히 알게 된 구노는 이제
는 진짜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고 교도소를 나오자 마자 계부를 찾아가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외할머니는 어디에 살고 계시는 지를 알아낸다.
외할머니로부터 엄마, 아버지와 친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처음으로 들은 구노는 자기가 한국
에서 1900년대 초기에 멕시코로 첫 이민 와, 노예처럼 살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멕
시코에 정착한 한국인의 후손임을 알고, 자신의 고국인 한국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자 한국
에서 오랜 기간 선교생활을 하신 성 요한 신부님을 찾아 간다.
유일하게 순수 한국인의 피를 가졌던 아버지가 미국에서 젊은 나이에 횡사를 하고 친할머니
도 고국에 대한 한 맺힌 희망을 품은 채 맥없이 돌아가셨다는 요한 신부님의 말씀에 자신은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 친할머니의 한 맺힌 희망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요한 신부님께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구노는 신부님의 소개로 멕시코
시티의 한 여행사에 여행 가이드로 취직을 해서 한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중 한상희라는 순수한 한국인 여인을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상희와의 2년 간의 동거 끝에 구노는 청혼을 하고 청혼 승낙과 함께 자신의 아이도 가지
게 되었다는 꿈 같은 얘기를 듣는다.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마지막 절차로 한국으
로의 귀화를 신청하나 젊은 시절 범법사실 때문에 귀화는 반려되고 구노의 인생은 다시 나
락으로 빠져든다.
2년 후 상희는 딸과 딸을 데리고 구노 곁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구노는 자기 딸이라도
한국에 돌아가 할머니의 원을 풀어 드렸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나 상
희는 자신의 새 출발을 위해 딸을 다시 구노에게로 돌려 보낸다.
구노의 딸은 구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지만 점점 커 가면서 구노의 희망과는 달리 한
국인임을 애써 외면하려 하고 좋은 직장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딸이 미국에서 남자를 만
나고 구노에게 앞으로는 아버지를 부양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구노는 이제 더 이상
의 희망은 없다는 절규를 하며 막은 내린다.

III.

“안부라도 전할 사람들이 고국에 계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어요. 저는…… 대한민
국이라는 나라에 단 한 사람도 저를 염려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저에 비하면 여러분
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고국도 있고.. 또 돌아가면 언제든 반갑게 맞아 줄 가족, 친지, 친
구들이 계실 테니… 제가 여러분들을 길거리에서나 공원에서 또는 일터에서나 무슨 행사장
에서 만날 때 마다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바로 고국에 자신을 염려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태극기를 흔드는 그 마음에 감동이 있든 아무런 느낌이 없든
간엡 여러분들은 언제나 코리안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가슴이 미어지고 복받쳐 흐
르는 눈물이 흘러도… 아무도 한국사람으로 봐 주질 않지요.”

극 중 전반부와 후반부에 구노 오크만이 관객에게 하는 말이다. 외모는 한국인임에도 한국
사람이 아닌 구노는 돌아갈 조국이 있고 누구에게도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한국
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한국인이라고 절규를 해도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구노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은 이렇게 돌아갈 조국이 없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조국이 없다는 설움은 일제시대의 우리 선대나 아는 아픔인 줄 알았더니 여기 구노 오크만 같이 외국에서 태어나 자기 조상도 모르고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한국인의 피를 지닌 한국사람임을 아는 경우에도 조국이 없는 아픔을 느끼는 것인가?
나라를 잃어버린 일제시대 우리 선대들의 아픔과 나라가 있음에도 당당하게 자기 조국이라고 말 못하는 구노의 아픔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소년원에서 보낸 3년 세월 내내 나는 이런 질문에 직면해서 지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왔고 나를 닮았을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구노가 자신이 한국인의 피를 지닌 한국사람이라는걸 깨닫는 순간 그에게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던 구노에게 자신이 한국사람이라는 것은 커다란 충격과 의문과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미 여태까지의 삶이 너무 힘들고 의미 없는 것이었기에.

“코로나 킹 오크만! 그는 프레그레소의 희망이자 멕시코에 사는 온 대한사람들의 꿈이었지.
그건 코로나 킹의 에미, 그러니까 니 친 할미의 피눈물 나는 고집불통과 오기로 버텨나가는
꿈이기도 했지. 나같이 천하게 살아온 사람들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는 희망이었건만, 그 할
미는 그 고집을 그 어떤 무시무시한 절대 신앙보다 귀히 여기면서, 험난한 세상풍파를 이겨
나갔지.”

“코로나 킹 오크만은 멕시코에 남아있는 대한인의 마지막 혈통이었으며 이귀례 할머님이 그
토록 처절하게 갈구하며 살아온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의 화신이기도 했던 것이죠.”

“이귀례 할머니는... 중략… 이양덕씨, 자기 아버지 시체 앞에서… 중략…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대한인으로 남아서, 당당하게 돌아갈 것이다.’ ”

자기 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국에서 멕시코로 반 노예처럼 이민 와서 그토록 힘겨운 생활을
했음에도 한시라도 한국사람임을 잊지 않고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한에 가까운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자랑스런 한국인이었음을 알게 된 구노. 선조의 발자취를 하나 하나
더 알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랑스런 대한인으로 남았던 할머니의 한스런 염원은, 이제
구노에게로 생물학적 유전인자인 양 전염된다. 자신도 할머니 같은 당당한 한국인이기에 이
제 정체성의 혼란도 없고 자기도 할머니처럼 당당한 한국인으로 살아가리라는 새로운 인생
을 시작한다.

“한상희! 그녀는 미국이나 여타의 나라에서 살다가 온 재외 한국인 동포도 아니었고… 또
나 같은 한인 후손의 자녀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다, 멕시코에
직장을 잡아 날아온… 순수한 한국인 여성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구노에게는 멕시코 여자도 아니고 자기처럼 외국에서 태어난 한국 여자
도 아닌, 진짜 한국에서 태어난 순수 한국인 여자는, 이미 자기 속에 깊이 뿌리 박혀버린,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살련다는 할머니의 한스런 희망을 충분히 실현해 줄 수 있는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자기의 정체성이 이제는 당당한 한국인임을 알게 된 구노에게 한국인 여자
와의 결혼은 몸도, 마음도 모두 한국인이며 태어나는 2세도 한국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부푼 희망을 주었고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앞으로의 인생을 가름하는 마지막 단계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영사님 앞에서 귀화를 하겠다고 인터뷰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귀향이라는 말이 더 맞는 말 아니겠어요?”

전과자라는 이력 때문에 한국으로의 귀화도 불가능해 지고 아내에게도 버림 받게 된 구노.
그는 자기가 당당한 한국인이며 자랑스런 한국인 할머니와 아버지의 후손임을 너무도 당연
히 여겼기에 인터뷰하는 영사에게 귀화가 아닌 귀향이라고 말한다. 이제 할머니와 자기 선
대의, 당당한 한국인으로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한스런 희망을 실현하려는 마지막 단계에
서 구노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스스로를 당당한 한국인이라 생각했기에 한국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구노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거기에 더해 아내와 자식까지도 잃어버린 구
노에게 이제 정체성은 자기를 꿋꿋하게 세워주는 지지대가 아닌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
어 버리고 무엇이 옳은 건지 확신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인생의 커다란 장애로 변해 버렸
다. 정체성을 몰랐을 때는 잃어버릴 것이 없었지만, 이제 한국인이라는 정신적 지지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까지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자기상실의 극한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구노 오크만의 선대 어르신들. 지금 천상에서 똑똑히 저를 바라보고 계신
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그렇게 묻히고 싶으셨던 고국 땅을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도 저
도 못하고… 저 당신들의 운명을 고스란히 물려 놓고 간 내게… 한스러운 눈빛을 보내느라
… 아직도 저승 문 앞에서 주저하고 계시나요?
아직도 가끔씩은 이렇게 소리치시나요? 땅을 치고 통곡하시면서 말이죠? 이것이 나라의 죄
냐? 사회의 죄냐? 아니면 나의 죄냐? 그것도 아니면… 운명이냐 하고 말이에요?”

“할머니, 내가 오래도록 사랑할 대상의 가치가 더 중요한가요? 아니면 오크만가 후손이 선
대의 원을 이루기 위해 이 힘겨운 애증의 골을 메워가는 것이 중요한가요?”

누구의 죄인지도 모르면서 정체성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구노. 사랑할 대상도 정체
성의 울타리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고, 선대의 운명도 고스란히 물려 받아야만 자기의 정
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구노에게, 지금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구노와 정체성을
찾고 유지하려는 구노 사이에 파인 깊고 넓은 괴리는 견디기 힘든 크나큰 시련이 되어 버렸
다. 오히려 이제는 자신을 그토록 당당하게 만들어 준 선대들이 원망스럽고 자신이 한국인
이라는 그토록 당당했던 그 정체성을 버리고 싶어진다.

“니가 세상과 처음 마주 대하던 날. 강보에 쌓여서 이 아비를 말뚱말뚱 쳐다보던 모습이 생
생하다. 그 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하기 그지 없었던 내갉 널 보면서 무슨 결심
을 한 줄 아니? 온전한 한국인 엄마와, 반쪽 짜리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은 아빠의 혈육으로
태어난 내 딸은… 반드시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자라게 하고야 말 것이다 라고…

그래도 잊을 만 해서 숨은 쉴 정도가 되니…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유언대로 내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네가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어. 알지, 알고말고… 그게 네
뜻이 아니었다는 걸… 어쩜 넌 그것까지도 내 운명을 닮고 태어났니? 너도 누군가에게 버려
진 게야. 내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지만 걱정 마라. 그래! 그 때 내가 두 번째로 이를 악물고 내린 결심이 무엇이었는지 아
니? 난… 결단코 너를… 버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내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너를 지
키고… 보살피련다고…”

이제 구노는 자기 할머니, 아버지와는 다른 현실에서 할머니, 아버지와 같은 한스런 희망만
가진 한국인으로 남는다. 스스로 찾아 자부심을 갖게 하고 삶의 의미를 주었던 정체성이었
기에 버리지도 못하고 할머니, 아버지가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것은 바로 할머니가
아버지에게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간직하고자 했던 그 바램 그대로 구노는 자기
딸에게 자기가 찾지 못한 정체성을 찾고 간직하려 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유전자적 성질을 지니고 있어 그의 딸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희
망을 간직한 채로.


“그 할미 숨이 꼴딱 넘어가는 순간에도 그 노래는 멈추지 않더군.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

새집은 멕시코이고 헌 집은 자기가 그토록 갈망하는 한국이라는 뜻인가? 새것은 더 좋은 것
이고 값도 더 나가고 앞으로 더 쓸모 있는 것이라는 통상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런 새집
을 주더라도 헌 집이 돌려달라고 구노의 할머니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노래를 했다. 한이 맺
힌 정체성의 화신이 구노의 할머니였고 구노도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아디오스, 멕시코! … 혹시라도 내갉 이 땅에 다시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때는
가장 확실한 멕시코 인으로 살아 볼께.”

“굿나잇 코리아! … 너를 차라리 모르고 살았었다면… 차라리 모르고 지내 왔었더라면…”

확실한 멕시코인으로 살지도 못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구노
에게 자신의 딸조차 자기를 거부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할 때 구노에게 남은 선
택은 하나뿐이었다. 차라리 모르고 지냈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코리아라는 나라. 코리
아를 알게 된 것이 삶의 희망을 주었지만 결국 코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해 삶을 버려야만 했
던 구노. 이런 구노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을까? 아니 그것만이 구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이었을까? 차라리 철저한 멕시코인으로 멕시코에 남아 철저한 한국인으로 살 길은 정녕
없었던 것일까?
마치 구노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로 착각할 정도로 가락과 가사가 이 연극
의 주제를 제대로 표현한 음악이 흐르며 구노의 연극도 막을 내린다.

“Donde voy 노래: 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로 가야만이 삶이 있는 걸까? 난 희망을
찾아 가고 싶어요/ …중략… / 당신 없이 살아 간다는 건 참으로 무의미한 삶이지요/ 도망자
처럼 사는 것은 더욱 그렇구요.”

사진설명
‘이것이 나라의 죄냐” 아니면 운명이냐?’ 나라를 잃어버린 일제시대의 우리 선대들의 아픔과, 나라가 있음에도 당당하게 자기 조국이라고 말 못하는 구노의 아픔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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