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신지(神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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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신지(神誌)의 역사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9.10.3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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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모 발행인
이형모 발행인

신지와 신지비사(神誌秘詞)

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에 고조선 3대 단군에 관하여 “가륵단군 3년에 명을 내려 신지 고결에게 배달유기를 편수토록 하였다”고 기록됐다. 배달유기는 배달의나라 역사서를 말한다.

옛 사서에서는 단군 때에 신지(神誌)란 사람이 있어서 사관이 되었다고 했는데, 신지는 관직명이고 곧 ‘신치’의 한역(漢譯)이다. 신치는 ‘신크치’의 약자이고,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며, 신가는 정부를 구성하는 ‘다섯 가(加 또는 家)의 수석대신이다.

신치 곧 신가는 언제나 ‘신수두’의 제삿날에 우주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들의 이야기와 예언 류의 경계담(警戒談)을 노래하여 그것이 후대에도 계속 따라 하는 관례로 되었다.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그의 관직명인 ‘신치’를 책 이름으로 했으니, 이른바 <신지>와 신지비사(神誌秘詞)가 그것이다.

지금은 <신지>와 신지비사가 멸절하여 그것의 가치 여하는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어진 것인 만큼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신지비사>

<고려사> 김위제전에 <신지비사>의 한 부분 10구절을 번역하면, “(조선의 삼경은) 마치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과 같은데, 저울대는 부소량, 저울추는 오덕지, 저울판은 백아강에 해당한다. 찾아오고 항복해온 나라가 70개국이니, 그 덕에 의지하여 단군의 정신을 지켜나갔다. 우두머리와 말미가 같은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니, 나라가 흥성하여 태평을 누렸다. 그러나 만약 이들 삼경(三京)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은 쇠하여 기울어 질 것이다.” 라고 기재해 놓고, 부소량은 지금의 송도, 오덕지는 지금의 한양, 백아강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송도, 한양, 평양은 고려의 삼경이지 대단군의 삼경이 아니다.

조선 대단군(大檀君)의 삼경은, 그 하나는 지금의 하얼빈이니, 옛 역사책에 부소갑, 비서갑, 또는 아사달로 기록된 곳이며, 그 둘은 지금의 해성, 개평이니, 오덕지, 오비지, 안지홀 또는 안시성으로 기록된 곳이며, 그 셋은 지금의 평양이니, 백아강, 낙랑, 평원 또는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삼경의 위치로 미루어 대단군이 다스린 삼한관경의 강역이 드러난다.

소개된 신지비사 10구(句)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인데,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漢學)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던 시문(詩文)을 한문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는데, <신지>의 한역시도 한 예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비사(秘詞)라 했는가? 고대에는 역사 종류를 성서(聖書)라 하여 왕궁에 비장하고 민간에 유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지>와 신지비사 같은 중요한 서적이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했는가?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에 왕궁의 비장 서적이 병화에 불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었으며, 이조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書雲觀)에 깊이 감추어 두었는데, 이것마저 또한 임진왜란의 병화에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행촌 이암과 일십당 이맥

행촌 이암은 고려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 벼슬을 마치고 1363년 ‘단군세기’를 편찬했다. 단군세기는 단군조선과 대부여 47단군 치세 2096년 간을 서술하고 있다.

일십당 이맥은 1520년 조선 중종 조에 찬수관으로 임명되어 내각의 비장 서적을 접하고 ‘태백일사’를 편찬했다.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 8권으로 구성됐으며, 태고와 상고사를 포함해 대진국과 고려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정리한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에 “행촌선생께서 일찍이 천보산에 유람할 때 태소암에 묵었는데 한 거사가 있어 ‘저희 절 서고에 기이한 옛 서적이 많습니다’하고 말하기에 이암은 이명, 범장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환단(桓檀)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결(眞訣)이었다.(중략) 행촌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화도 홍행촌으로 퇴거하신 후 스스로 홍행촌의 늙은이라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써서 가문에 간직하셨다.”고 기록했다.

행촌삼서는 단군세기와 태백진훈, 농상집요를 말하는데, ‘환단 시대의 진결’이라 함은 배달의나라와 단군조선의 고서로서 ‘배달유기’나 ‘신지비사’와 같은 역사책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다. 50년 관직에 있었던 행촌 이암은 당대의 대학자로서 환단의 진결을 해독해 ‘단군세기’와 ‘태백진훈’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이암과 천보산 유람에 동행했던 범장은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편찬했다.

또한 일십당 이맥은 이암 선생의 고손자로서 조선 중종 조에 찬수관이 되어 서운관의 고서, 진결을 두루 접하고 방대한 ‘태백일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 병화 속에 불타버린 배달유기, 신지비사, 고기(古記) 등의 옛 역사책을 직접 볼 수 없으나, 이암과 이맥이 편찬한 역사서에서 그 자취를 만날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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