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사까 코리아타운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도쿄지역과 오사까지역 코리아타운을 비교함으로서 변화의 실체와 한류의 근원을 밝히고자 한다. 도쿄지역이 뉴커머 중심의 소기업이 집중되는 것과는 반대로 오사까지역은 올드커머들이 집거하고있는 지역이 대다수로 보수적인 색채가 강하다.
거리의 풍경을 보면 도쿄지역 코리아타운(신주쿠구 오쿠보도오리와 쇼쿠안도오리가 대표적이다)은 한국의 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한글이 난무하지만, 오사까지역 코리아타운은 일본어표기에 한글을 가미한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일본속의 작은 한국을 연상케 한다.
오사까지역의 재일코리안들은 이쿠노쿠 지역 안, 미유키도오리, 츠루하시, 이마자토신지를 중심으로 집주하고 있다. 오사까 코리아타운이 위치한 미유키도오리는 대부분 제주도에서 밀항한 이민1세가 집주해 왔으며 주류사회에 편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계수단으로 헤푸샌달공장, 고무공장, 유리공장, 금속하청, 종이줍기, 고철줍기, 밀조(술) 등이 주요 직업 이었다. 1989년 한국정부의 ‘해외여행자유화’ 이후 도일한 뉴커머들은 연장자는 김치나 헤푸샌달 공장에 취직했으며, 젊은이들은 이마자토지역를 중심으로 유흥가로 유입되었다.


오사까지역의 특성으로서 재일코리안의 구성비율은 미유키도오리는 올드커머, 이마자토는 뉴커머, 츠루하시는 혼합형으로 중충구조를 이루고 있다.
츠루하시나 이마자토 지역은 올드커머가 세운 상점가에 뉴커머가 진입한 지역이다. 미유키도오리는 백제 도래인이라는 역사적 특성상 올드커머가 집주하는 지역이었으나 최근에 한류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한류가 이 지역의 전체적인 모습이나 흐름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재일코리안들이 주관하는 지역민과 공생프로그램, 한글학교운영, 한국수입 문화상품 판매, 한글간판의 증가가 뚜렷하다.
도쿄지역 코리아타운은 세계화와 더불어 한국정부의 89년 ‘해외여행자유화’조치 이후 도쿄를 중심으로 취학생(일본어학교 학생)이나 유학생, 주재원들이 늘어나면서 탄생하였다. 한국가정요리, 비디오, 식료품판매점이 코리아타운의 주업종이었다. 중심고객은 스나쿠(스낵)나 크라브(술집클럽)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일본어가 서툴기 때문에 일본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으며 뉴커머 집주지역에 거주하며 한국음식이나 문화상품을 즐겨 찾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크라브나 스나쿠가 집중되어있는 지역에 코리안타운이 형성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일하기 시작한 뉴커머들은 도쿄지역 코리아타운에 집주하여 당당한 한국인을 강조하면서 한국김치나
음식문화를 기업의 문화사업으로 연결시켰다. 뉴커머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음식은 김치에 들어가는 마늘냄새나 매운 고추가루 때문에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러다면 어떻게 뉴커머소기업들이 김치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각지역마다 식료품판매점을
세워 한국음식과 문화상품을 홍보했다. 일본인들에게 부정적인 한국의 음식문화를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통하여 확장 시켜 나갔다. 이제는
한류의 영향으로 일본인 스스로가 한국음식, 문화상품을 즐겨 찾게 되었다.
뉴커머기업가는 국제화나 80년대 이후 일본 사회 전반적인 시대흐름에 잘 적응하면서 무조건 차별과 냉대 받았던 한국 음식의 이미지를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본격적으로 대형 한국음식점이나 식료품가게로 성공한 기업가가 탄생 되었다. 올드커머가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감추며 사업을 하는 것과는 달리 뉴커머는 한국의 맛과 문화상품을 적극 홍보하여 상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이러한 뉴커머기업가의 성공배경에는 일본이라는 차별사회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올드커머가 존재한다. 현재 뉴커머와 올드커머를 아우르는
‘재일코리안’ 탄생은 80년대이후 일본에서 뉴커머 증가나 한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존연구에 의하면 올드커머 기업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기반에 뉴커머가 들어가 성공하는 사례가 적지않게 발견되고 있다.
재일코리안 조직은(총련이나 민단) 지금 커다란 해체위기를 맞고 있다. 총련이 세운 학교가 학생수의 감소, 일본정부의
재정적압박(세금부과) 등으로 폐교가 늘고 있다. 한때 총련계 초급, 중급, 고급학교가 많을 때는 150개 교였는데, 효율적인 자산운영을 위하여
통폐합 학교증가, 주차장이나 용도 전용된 학교를 제외하면 100개 정도이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 조선학교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귀화자나
뉴커머 입학허용, 교과서개편으로 조선이나 한국이라는 교육방침이나 구분보다는 우리나라 사람과 우리말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학교가 대부분 일본정부의
큰 지원이나 정식허가 없이 운영되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애국애족심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일본정부에 공립학교에 준하는 교육지원을 계속해서 건의하고
있다. 민단도 마찬가지로 재일 2-3세나 귀화자 수의 증가, 조직의 매너리즘화로 해마다 축소되고 있다.
총련과 민단의 해체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재일코리안’ 들의 문화운동 이다. 총체적인 위기의식 속에 오랫동안
속박되었던 이데올로기, 차별에 매인 사슬을 끊고 경제와 문화를 모토로 과감한 상호문화수용과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세계화나
남북정상회담, 월드컵 공동개최, 한류 등으로 재일코리안 들은 사상과 이념보다는 공생과 경제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에서 작년 ‘겨울연가 방영과 ‘욘사마(일본인들이 배용준를 부르는 존칭)’의 방일로 불기 시작한 한류는 실제로 한국보다 일본에서 뜨거웠다. 혹자는 한류가 일시적으로 일어난 거품이며 순식간에 사라질 거라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누구나 만나면 ‘겨울연갗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욘사마’에 대한 열광은 여전하다. 뉴커머기업들은 이러한 현상에 쾌재를 부르고 있으며 인기가 반전되지 않을까 조바심마저 갖고 있다. 이러한 한류 덕택에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이 일본인들로부터 한단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기업도 한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일본학원가는 한국어나 한국문화강좌 증설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관심사는 “왜 한국배우가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지! ” 라는 다소 황당해 하는 눈치다. 각종 매스컴에서도 한국배우에 대한 인기에 의아해 하며 다양한 해석들을 쏟아내고 있다.
혹자는 한류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부터 불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한류가 단지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 드라마에 대한 해석도 일본식 드라마 베끼기, 일본인의 잃어버린 노스탈지아 현상, 그리고 한국인 미남미녀 배우의
성형논란에 이르기까지 분분하다.
그러나 한류는 어느날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아니다. 한류가 불기까지 일본에는 거의 20여년간을
다양한 차별 속에서 끝까지 인내하며 문화사업을 전개한 뉴커머기업가가 존재한다. 또한 지금까지 말없이 ‘재일코리안’의 인권운동을 전개해온 숨은
봉사자, 남북정상회담, 월드컵 공동개최가 한류와도 직결되어 있다.
한류는 이러한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이 뉴커머가 주도해온 문화사업과 연결되면서 사회적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사까 코리아타운의 큰
변화는 올드커머가 한류를 관망하는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달라지고 있다.
한류가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하여 재일코리안들이 경제와 문화을 중심으로 포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오사까에서는 재일코리안 사회의 변화에 따라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시민레벨의 다문화 공생사회 프로그램이 활기를 띄고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흐름에 따라 한상과 네트워크 구축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한민족 주체의 경제공동체 형성과 공생공존의 인류평화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코리아타운 중앙상점가에 작년 가을에 ‘이문화체험센터’ 을 개업하여 한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기업가
(덕산물산 홍려표회장, 남자, 74세)의 인터뷰를 통하여 최근 오사까에 어떤 변화가 일고있는지 살펴보자.


전남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세계한상문화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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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언 전남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