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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역사산책]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이형모 발행인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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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10  11: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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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소서노 여대왕의 백제 건국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召西努) 여대왕으로 하북위례성(지금의 서울)에 도읍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비류, 온조 두 아들이 분립하여,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온조는 하남위례홀(서울 송파)에 도읍했으나 그 후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다.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첫 남편, 곧 부여인 ‘우태(優台)’이므로 비류와 온조의 성도 부여(扶餘)이다. 소서노는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고주몽)에게 개가하고 재산을 기울여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했다. 그 때문에 추모왕(鄒牟王)은 소서노를 정궁으로 대접하고 비류, 온조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유류 왕자 출현으로 고구려에서 분가

그 후에 유류(儒留: 유리왕)왕자가 모친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돌아오자,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는 소후(小后)로 강등됐으며, 유류가 태자로 되고 비류, 온조의 신분은 덤받이 자식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 온조가 상의하여 말하기를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모친에게 있거늘,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기댈 데 없는 자들이 되었으니, 대왕이 계실 때에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대왕이 돌아가신 후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디에 서겠느냐. 차라리 대왕께서 살아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고는 그 뜻을 소서노에게 전했다.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다수의 금은보화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마려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馬韓)으로 들어갔다. 이때의 마한왕은 번조선 기준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으로 백리 떨어진 땅 ‘미추홀’과 ‘하북위례홀’ 등지를 얻어, 소서노를 왕으로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 했다.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합하여 백제를 침입하고 핍박이 심했는데 소서노는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예’라고 쓰지 않고 ‘말갈’이라고 썼는데, 신라 말기에 당나라 사람들이 예족을 말갈이라 적은 것을 보고 고기(古記)의 ‘예’를 모두 말갈로 김부식이 고친 것이다.

소서노 사후 두 아들이 분국

소서노가 재위 13년 만에 죽으니,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제왕(女帝王) 창업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자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와 온조 두 사람이 상의하기를 “서북의 낙랑과 예가 계속 쳐들어와 괴롭히니, 이 땅을 힘들게 지키느니 차라리 새 터를 찾아 옮겨가는 것이 옳다.”하고 형제가 오간,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한양 북악)에 올라 도읍할 만한 자리를 살폈다. 비류는 미추홀을, 온조는 하남위례홀을 선택해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 마려들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위례홀은 북으로는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는 옥택을 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끼고 서로는 큰 바다에 둘러싸여 천험과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거늘, 어찌 이 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려합니까.”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않았다. 형제가 토지와 인민을 갈라서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동, 서백제로 나뉘었다.

미추홀과 위례홀

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 13년까지는 사실 소서노의 연조(年祚)이고, 그 다음해 14년이 온조 원년이다. 13년에 기록된 온조가 천도하면서 내린 조서는 비류와 충돌한 뒤에 온조에 속한 인민들에게 내린 것이고, 14년, 곧 온조 원년 기록에 “분한성민(分漢城民)”은 비류, 온조 두 형제가 한성의 인민을 갈라 각자의 영토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이니, 지금까지도 어느 동네나 동편에 오리골이 있고 서편에 메주골이 있으니 그 유래는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짜서 살 수 없으므로 인민들이 많이 달아났으나, 온조의 하남위례성은 토지와 물이 적합하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히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비류가 실패하므로 창피해서 병이 나 죽고, 그 신민들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백제는 다시 하나로 되었다.

온조가 마한(馬韓) 50여 성을 모두 얻다

백제가 마한의 봉토를 얻어 건국하였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마한에 대하여 공손히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여, 사냥한 노루와 사슴을 마한에 보내주고, 전쟁을 하면 얻은 포로들을 마한에 보내주었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에는 온조가 서북의 예(濊)와 낙랑(樂浪)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북으로는 패하(浿河: 대동강)로부터 남으로는 웅천(熊川: 공주)에 이르기까지를 백제의 땅으로 획정해 달라고 요구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고, 그 후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자를 보내어 꾸짖기를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내려왔을 때 발 디딜 땅도 없다가 내가 서북 백리의 땅을 떼어주어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이것이 어찌 의리상 허용될 수 있는 일이냐.”고 했다.

온조가 거짓으로 부끄러운 빛을 보이고는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 말하기를 “마한왕의 정치가 그 도를 잃어 나라의 세력이 자꾸 쇠약해지고 있으니, 이럴 때 취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조가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도(國都)를 점령하고 마한 휘하의 50여 개 나라들을 다 쳐서 멸하였으며, 마한의 유민으로 의병을 일으킨 ‘주근’의 전 집안을 참살하였는데 온조의 잔학함이 심했다. 이로써 백제는 나라의 기반을 크게 세웠다.

번조선의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 와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韓氏)라 하여 자손에게 전하다가 이때에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망하여 끊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온조는 원래 부여 출신인데, 여기서 마한인이라고 한 것은 중국인들은 언제나 백제를 마한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대주류 두 대왕과 동 시대 사람이니, 온조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입과 노략질을 기록한 것이 없는 이유는 이미 대주류왕이 낙랑을 멸했기 때문이다.

* 단재 신채호 ‘조선 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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