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발해의 본래 이름은 ‘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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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발해의 본래 이름은 ‘대진국’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9.08.1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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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고구려가 패망할 때 ‘후고구려’의 깃발을 세우고 일어난 사람은 대중상과 그 아들 대조영이다. 발해는 중국이 칭한 이름이고 본래는 대진국이다. 조선 중종 때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 대진국 본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대중상의 후고구려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됐을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나라의 변고를 듣고 마침내 사람들을 이끌고 험한 길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8천명이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본거지를 삼았다. 성벽을 굳게 쌓아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여러 성이 모두 귀속하여 들어왔는데 오직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중광32년(700년) 5월에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라 하였다.”

대조영 황제의 대진국

“태자 대조영이 대중상의 부음을 전하는 신하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2대 황제에 즉위했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10만 군사를 모집해 그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계책을 정하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게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 장수 이진영과 함께 병력을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파하고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지키도록 배치했다. 고구려 멸망으로 떠도는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정착하여 살도록 보호하니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새로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는데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천리가 개척되었다... 926년 15대 애제(哀帝) 인선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공히 259년이다.”

이 역사 기록에 따르면 668년에 대중상이 건국한 후고구려를 대조영이 물려받아 701년에 대진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고, “15세를 전하여 공히 259년이다”라고 한 것은 668년 대중상의 개국으로부터의 역년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교과서 왜곡

1900년대 후반 이후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대진국과 대조영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7세기 말에 속말말갈의 수령 대조영이 정권을 수립하였다. 개원 초기에 당 현종(712~756)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고 홀한주를 통일적으로 관할하게 하였으며 대조영을 
홀한주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로부터 속말말갈은 발해를 국호로 하였으며 발해도 정식으로
당나라의 판도로 들어왔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속말말갈의 수령이 아니고 고구려의 장수다. 대조영이 부친 대중상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은 후 고구려를 망하게 한 당나라를 적으로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파해 당나라를 제압했는데 어떻게 당나라의 벼슬을 받고 속국이 될 수 있는가? 

더욱이 대조영이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천통'이라하고 대진국을 선포한 후 11년이 지나서야 당 현종이 즉위했는데, 어느 세월에 대조영 황제를 홀한주도독으로 임명했다는 말인가? 더욱이 대조영 황제는 생전에 당 현종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다.  ‘필요하면 근거 없이도 조작하는’ 중국 역사서의 상투적인 왜곡 조작 사례에 불과하다.

해동성국(海東盛國) 대진국의 전성기

세조 대중상 32년, 태조 대조영 21년, 3대 광종 무예가 19년을 다스렸다. "3대 광종 무예,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았다. 마침내 5경(京), 60주(州), 1군 38현을 소유하니 강토의 길이가 9,000리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4대 문왕 흠무가 즉위해 대흥(大興)이라 개원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환단고사(桓檀古史)를 강의했다.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1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영향을 펼쳤다. 대흥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 라고 했다.”

4대 문황제 재위 57년간이 대진국의 전성기이다. 태학을 세우고, 방대한 국사125권을 편찬하고, 
배달의나라와 단군조선의 옛 역사를 가르쳤다. 문치와 예악을 일으켜 홍익인간의 교화를 만방에 
전했다 하니 문화국가로서 대진국의 국위를 떨친 것이다.

대진국의 정체성

대중상은 건국하면서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했다. 영토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여러 민족이 연합했으나 고구려의 유민이 가장 많았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고려국왕’이라고 했다. 중국 역사서들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왕건의 고려도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 이름이다.

대조영 황제는 그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단군과 기자조선의 역사를 편찬할 것을 명했다. 대야발은 13년 간 각처를 답사하고 자료를 모아 '단기고사(檀奇古史)'를 편찬했다. 

4대 문황제 2년에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와 환단고사(桓檀古史)를 가르쳤다. 고구려의 교육제도를 복원해 계승한 것이다. 배달의나라와 단군조선의 역사를 가르쳤으니 대조영 황제와 대진국 백성들은 배달겨레요 단군의 자손이다. 한국사에서 대진국 259년 역사는 남쪽의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조시대’라고 기술해야 마땅하다.

당나라의 힘을 빌어 통일을 이루고 조공국으로 몸을 낮춘 통일신라와 달리 대진국(발해)은 시종일관 당나라와 맞서 싸웠다. 당나라와 대적하는 대진국의 역사를 통일신라와 더불어 민족의 역사로 기록하는 것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5 진덕여왕 5년조에서 ‘신라 법흥왕이 당나라와 별도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던 비루한 사대주의자였다.

문황제 2녀 정혜공주의 묘비 출토

1949년 길림성 돈화현의 현성 근처의 육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됐다. 묘비는 모두 25행이며 본문은 19행인데, 비문 제2행에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지이녀야(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之二女也)’의 기록이 있다. 여기 ‘대흥(大興)’은 대진국 4대 문황제의 연호이다. 정혜공주의 이 비문이야말로 ‘태백일사’의 사료적 가치를 입증해 주는 좋은 결정적 자료라 할 것이다. ‘문황제의 연호는 대흥’이라고 밝힌 역사서는 ‘태백일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홀한성 -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

대조영 황제가 홀한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는데, 대진국 5경 중에 홀한성이 상경 용천부이다.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이다. 이 성의 남쪽에는 경박호(鏡泊湖), 북쪽에는 목단강(牧丹江)이 둘러 싸고 있으며 규모가 광대하고 웅장하다. 연해주와 만주 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와 대진국의 장엄한 역사의 물줄기가 1712년 조선 숙종 38년에 청나라와 함께 세운 ‘백두산 정계비’로 이어져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간도의 기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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