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러시아와 아랍: 이데올로기보다 국익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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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러시아와 아랍: 이데올로기보다 국익 우선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 승인 2019.05.3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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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오스만터키 이전, 아랍에 큰 관심이 없었고

러시아는 오스만 터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더 약화된 아랍 지역으로 진격했다. 러시아는 직접적인 전쟁 또는 오스만 터키에 대항해 일으킨 봉기나 혁명을 지원하는데, 군사적으로는 발칸 지역, 카프카스 지역, 크림 반도로 남진했다. 이를테면, 오스만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러시아 해군의 공격이 있었고 1773년까지 베이루트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알리 베이 알카비르(1728-1773)가 모반을 하도록 러시아가 지원했다.

알리 베이 알카비르는 1768년 오스만 터키 통치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맘룩(이집트의 맘룩 왕조 참조)이었다. 그는 흑해 동부의 아브카지아에서 태어났고 러시아가 오스만 터키를 패퇴시킨 것을 알고 아브카지아 사람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을 때는 이 때라고 생각했다. 역사가들은 사전에 그가 러시아와 협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그때 카프카스를 점령한 러시아가 아브카지아 맘룩을 계속 지원해주겠다는 확신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적 및 외교적 압력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성지(아랍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땅이라고 말함)로 가는 순례자의 안전을 보장해야 했는데 러시아는 당시 팔레스타인에 학교와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소비에트 정권에게 아랍은 주요 관심 지역이 아니었는데 대부분 아랍 지역이 식민지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아랍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후진 국가라고 생각했다.

2차 대전 이후, 중동이 소비에트의 관심지역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소비에트는 아랍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 냉전 시기에 접어들면서 아랍을 두고 서구와 소련이 경쟁하면서 중동이 관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소비에트는 중동에서 민족 해방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들은 식민주의를 반대하던 진보 체제를 지지하던 사람들이었다. 아랍은 어느 나라에 종속되거나 지배받는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제 중동 지역에서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는 강요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진보체제와 해방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모스크바는 중동에 남고자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가말 압둘 나세르를 지지했던 소비에트가 서구와의 각축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소비에트는 아스완댐을 건설하는데 참여했고 1967년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아랍 군에게 수천 명의 소비에트 전문 인력을 파병했다. 소비에트는 아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억압을 당해도 못 본체 했다. 소비에트는 지정학적 접근과 전략을 가미한 국익 우선 정책을 택했다.
 
소비에트가 1955년에 결성된 바그다드 협약(Baghdad Pact)을 좌절시키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으나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1972년 소비에트 기술진들을 추방하면서 아랍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시리아에서는 바아스당 출신 쌀라흐 자디드의 좌익 성향과 다르게 하피즈 알아사드는 서구 식민지 유산을 반대했고 소비에트와 외교 관계가 없었던 많은 걸프국가들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갔다.
 
1991년 대통령에 당선한 보리스 엘친(boris yeltsin)은 러시아 민족주의를 부르짖었지만 소비에트가 붕괴된 이후라서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약했다. 중앙아시아와 트랜스코카시아의 지역들이 과격한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받았다. 이즈음에 모스크바는 이란과 터키로 눈을 돌렸다. 모스크바는 이란에 군수물자와 원자로를 팔았고 터키와는 대결과 협력이 교차됐다.

러시아는 엘친 대통령 시절에 ‘유라시아(아랍어로는 우라씨야) 정책’을 시작했는데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부터 서유럽에 이르는 지리적 연장은 러시아 치안을 더 공고히 하게 했다. 그래서 세 개의 영역에서 동맹관계를 맺어야 했는데 첫째, 가까운 이웃인데 과거 소비에트국가에 속했던 나라들이고 둘째는 중국인데 경제적 협력을 강화해야 했다. 셋째는 유럽인데 러시아와 역사적으로 오랜 유대를 갖고 있었지만 교역에만 그치지 않고 국내 정치의 영향력을 주고받고자 했다.

시리아, 국제사회의 지지에서 직접적인 군사행동으로

1990년대 러시아와 아랍과의 관계는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2011년 아랍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러시아가 시리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또 다른 변화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을 때 러시아는 나토(NATO)의 위협과 적대적인 행동을 비난했다. 1991년 북대서양 협력회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NATO 군사 동맹과 러시아 연합간의 관계가 시작됐으나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반동으로 NATO가 러시아 연합과의 협력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크림반도의 위기는 유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강행한 것이다. 2014년 크림 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푸틴 대통령은 크림 공화국과 러시아를 합병하는 서명을 했다. 유럽연합(EU)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Crimean peninsula)를 불법적으로 병합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는 자신의 영토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땅이 합병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이후에도 러시아와 EU 간의 긴장이 계속됐다. 2019년에는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중동 정책 대변환은 시리아에서 나타났다. 시리아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대통령 하야를 부르짖던 시리아 국민들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밧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냈고 알아사드 정권에 무기와 돈을 댔다. 그리고 크림반도 사태 이후에는 러시아가 이런 지원 정책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군사 개입으로 전환했다.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키지 않고 러시아 군인들을 시리아로 파병시켰다.

시리아 야권을 지지했던 아랍의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분산시키면서 동시에 러시아 외교는 아랍 정치지도자들에게 양국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반드시 협력하는 방향으로 선회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아랍의 위기 상황에서 러시아와 아랍이 협력하는 내용은 극히 적었다. 시리아 문제에서는 의견 차가 컸지만 러시아는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종래의 입장을 견지했다. 지난 몇 년간 아랍과 러시아 관계를 보면 양측이 폭파할 뇌관은 미리 한 쪽으로 치워둔 다음에 서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선거 개입과 유럽의 우익 세력 지원
 
유럽의 10여 개 국가의 선거 과정과 정치적 사건에서 러시아가 개입됐다는 소문이 뜨겁다. 러시아는 유럽의 민주주의가 내적 위기와 내부 문제 안으로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러시아에 대항할 여력이 없다고 예단한다. 그중 대표적인 현상이 유럽의 관료주의라고 했다. 이번 달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유럽의 우익 포플리즘(Right-wing populists, 아흐잡 야미니야 와 샤으바위야)의 정치 지도자들이 모였다. 오스트리아 우익 정당은 수년 동안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러시아가 유럽의 선거 과정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두는 나라는 스웨덴,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이다. 그리고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된 국가들 중에는 우크라이나가 있다. 소비에트의 선거 개입에 대해 아랍 정치 기자 라이드 자브르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이데올로기에서 국익으로

2019년 5월 푸틴은 러시아에서 태어났거나 과거 소비에트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예멘, 시리아인의 경우,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러시아인 국적을 허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치가 자국의 국익을 생각하고 아랍의 관심사와 중심축을 찾기까지 지난 20년이 흘렀다. 러시아는 20여 개 아랍 국가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정책을 마련해 왔다. 1920년부터 1990년대까지 소비에트와 아랍 간의 관계를 형성했던 바탕에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소비에트가 멸망한 이후로 러시아에게 이데올로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레닌과 함께 사회주의가 번성하지 못했고 옐친과 함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륙하지 못했는데 푸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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