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윤재영 (美 알라버마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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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윤재영 (美 알라버마 /춘천)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04.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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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 윤재영의 학창시절 꿈은 대학교수와 박사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유학으로 힘든 난관을 뚫고 그 꿈을 이룬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쳤으나 도미(渡美) 후 다시 석사코스로 2년, 그리고 박사공부 6년 만에 대망의 철학박사 학위(Ph. D)를 땄다. 당시 그녀 나이 33세였다.


이때 남편 디도(Dedo)씨도 동시에 닥터학위를 받았다. 남편 전공은 영어 학, 그녀는 아동과 가족관계학 학위로 명예로운 박사부부가 된 것. 이들은 석사과정 시절 인디아나 대학원에서 만나 2명의 자녀를 둔 사이다.


윤박사 부부는 곧 남부 알라버마의 한 사립대학에 취직이 돼 거주지를 옮긴다. 남편은 커뮤니케이션 영어강좌, 그녀는 인간개발(Human Development)학을 강의키로 했다. 주위에선 부부박사 탄생과 함께 곧 알라버마 샘포드 대학교수로 임명되자 모두들 이를 축하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수강생들과 교수들이 전부 백인들뿐인 이 대학은 그녀에겐 큰 시련이었다. 특히 남부 알라버마 주는 인종차별 의식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수적 지역에서의 교수직은 사실 그녀에게 과중한 부담이었는지 모른다. 강의에서 자주 나타나는 배타적인 일부 학생들과의 부딪침, 또 학과장과의 불화 등으로 그녀는 캠퍼스 생활에서 또 다른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윤재영. 그녀는 지난 58년 춘천에서 3남1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나 일산초등교과 원주여중을 나왔다. 원주여고에 다니던 중 수학교사인 부친 윤주학씨의 춘천고교 전근으로 유봉여고로 전학해 졸업. 76년 강원대학 가정과 1회생으로 입학해 숙대 대학원에서 아동복지과 석사를 받았다.


강원대 심리학과에서 1년 조교생활을 하던 중 미국유학에 대한 막연한 꿈이 현실이 됐다. 美펜실바니아 대학원으로부터 입학허가증이 나온 것이다.    
"정말 준비도 겁도 없이 미국에 갔어요. 부모님에겐 큰 돈인 3천 달러를 만들어 주셔서 갖고 갔지요. 그런데 1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 식비를 내니 남는 돈은 아무것도 없더군요. 너무 갑자기 부딪친 변화라 감당키 어려웠고 꼭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매일 밤 울었다. 망망대해 속 난파선위에 떠 있는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몰랐다. 처음 6개월간은 계속 울며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이나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큰소리만 쳐놓고 온 처지에 도저히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외국인과 만나면 알아듣지 못해 그냥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누가 말을 걸어도 웃었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는 생각으로 사람을 만나면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혼자 있을 때의 얼굴은 항상 눈물범벅이었다.     


더구나 돈이 바닥이 나니 당장 생활에 지장이 왔다. 그렇다고 한국 집 사정을 생각하면 돈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운 좋게 그녀는 대학 구내식당과 청소 일로 아르바이트를 잡았다. 틈틈이 막일을 했고 방학기간에는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16시간 꼬박 일을 해 다음 등록비를 마련했다. 기숙사는 카운슬러 일로 1백 달러 돈까지 받으며 공짜로 살았다.

한편 밤에는 잠 안자고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지 않고는 공부를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해 같이 있는 기숙사 학생 노트를 베껴 죽기 살기로 공부했어요. 마침 학교에 'writing center(필기센터)'가 있어 리포트 쓸 때 영어과 조교 대학원생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대학원생중의 한명이 지금 남편이 됐다. 두 살 터울의 남편도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 공부하고 있었으며 박사와 교수가 되려는 그들의 꿈은 일치했다. "결혼 때는 냄비와 접시 등 식기류와 10년 넘은 중고 소형차뿐이 재산이었어요. 결혼과 동시 박사학위를 시작했고 나중 학위를 따곤 알라버마로 내려간 것이지요."


학생이 3천여 명인 유럽 고풍의 아담한 샘포드 대학.


그러나 학기가 시작돼 처음 학교 캠퍼스를 보니 크게 놀랐다. 전부 백인들 세계였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수는 전부 백인들뿐이고 청소부와 식당 허드레 일은 모두 흑인이었다.
학교에 첫 부임하고 신임교수를 위한 환영식이 컨트리클럽에서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완전 흑백계급이 구분돼 있었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영화장면을 연상시켰어요. 샹들리에 반짝이고 음악이 흐르는 파티 장에 백인들은 화려하게 꾸며진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흑인들은 정장을 입은 채 음식을 나르고 있었지요. 백인인 남편조차 맘에 안 들어 집으로 도로가자는 것을 겨우 진정시켜 거북스레 자리를 지켰습니다."


교내에서 그녀는 어디가나 눈에 띠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강의 또한 생각 같지 않았고 시행착오와 뼈저린 경험을 통해 선생이 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처음엔 교수 입장에서 학생은 무조건 나를 따라야한다는 식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내 잘못된 사고 일뿐 선생과 학생 간 서로 입장이 통해야 학생들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지요."


어느 날 후배교수인 학과장으로부터 10년 이상 지켜온 그녀자리를 소리 없이 박탈당하는 엄청난 아픔을 겪는다. 영국에서 남편 따라 봄 학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교수실이나 연구실 문에 걸렸던 그녀 사진과 팻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이 잠시 없는 틈에 학과장이 다른 강사를 채용하고 야간대학만 가르치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처음 한동안은 펄펄뛰고 항의를 하다가 같은 학교의 남편위치(부교수)도 고려해 주어진 현실대로 따르기로 했지요."


그녀는 굳게 마음먹고 생활자세를 바꿨다. 박사나 교수라는 명예욕이나 자존심을 과감히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백인들만의 주간대학에서 흑, 백인이 반반 섞인 야간대학으로 바뀌고 나니 오히려 학생들과 '인생의 나눔'에 대해 소중한 의미와 보람을 더 느끼게 됐다.


교수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는 윤재영(46세)교수의 야간강의는 차츰 수강생들에게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의 '인간개발학'과 '결혼과 가족' 두 과목은 어느 덧 교내 인기과목으로 부상했고, 학생들과의 따뜻한 인간관계로 사제간 거리감이 없어져버렸다. 한 학생은 윤 교수 강의를 듣기 위해 5시간 거리를 달려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록 시간강사지만 새로운 것을 찾아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윤교수의 진지한 노력은 어느 틈에 명강의 교수로, 한편으론 인생 상담역으로 학생들 마음속에 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국말로 한국학생들에게 인생강의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토로한다. 그동안 시(詩)로 한겨레문단(2004 봄호)에 등단했고 지난해는 '너만 행복하면 되었지.'라는 시문집을 발간해 어머니 7순 때 선물했다. 유아교육 산문집 3권(임신에서 여섯 살까지)을 썼고 시집과 수필 등 여러 권 책을 준비 중이라 전한다.


한편 매주 토요일은 버밍햄 한국학교 교감으로 교포사회에서 40명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일요일은 부부가 독실한 캐톨릭 신자로 미국성당에 다닌다. 혼자 있는 시간은 모두 책 쓰는 일이 전부라 할 정도로 글로 시간을 소일하는 윤재영 박사. 그녀를 시인으로 만든 당선작 '달맞이 꽃' 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님께서 꽃이라 하면/ 꽃이라 하고        
님께서 나무라 하면/ 나무라 하리
님이 원하시는 것/ 다 드리고 싶소이다
꽃은 꽃이라 해도/향기 없는 꽃
나무는 나무라해도/ 열매 없는 나무이기에
님 그리워/ 밤에만 피어나는/노란 달맞이꽃



(khso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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