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변상호(밴쿠버/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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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변상호(밴쿠버/정선)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04.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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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뱃사람의 친구


세계5대 미항중 하나로 꼽히는 캐나다 밴쿠버 항(港).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 항구엔 매일 10여척의 무역선이 들어 닥친다. 선원(船員)들 국적도 70여 개국에 이르고, 한국선박회사 이름도 자주 눈에 띤다. 동진, 동국, 범양 등 20여개 배 회사들 중 현대 상선과 한진 해운은 현지에 전용부두까지 설치해둔 상태다.

이 항구에 포트 채플린(선원을 위한 성직자)으로 외로운 뱃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뛰고 있는 한 동양인이 있다. 변상호(44세-요셉)라는 이 선교사는 선원선교를 위한 세계적 교단 '플라잉 에인절 클럽(The Flying Angel Club)' 밴쿠버 지부에 등록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영국 성공회 소속으로 1백년 역사와 전 세계에 3백 개 지부를 갖고 있다는 '플라잉 에인절 센터.' 장기간 배를 타는 외국선원들에게 이 센터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든 문제가 발생하면 항구에 닿는 즉시 이 센터(플라잉 에인절클럽)를 통해 애로점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밴쿠버센터에선 변 선교사와 다른 3명의 외국인 성직자(장로교 목사, 성공회 신부, 가톨릭 신부 각1명씩)만이 정식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만이 캐나다의 선교사 정규교육을 받은 이유에서다.


주위에선 선원들 뿐 아니라 항상 불우한 사람들을 돕고 사는 그를 '흙 속의 진주'라고 평한다. 한 교포는 인정이 메마른 오늘의 세상에서 순전히 남을 위한 봉사로 생을 이어가는 그를 두고 '21세기 예수.'로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첩첩산골인 강원도 정선군 북면 구절리.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태백선 종착지로 산천경개 좋은 바로 그곳이 변상호의 고향이다.

변상호는 지난 60년 소농 집안의 3남1녀 중 3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구절초교를 마치곤 불현듯 소년 몸으로 고향을 등지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홀로 교회에 다니며 신앙이 깊어가던 중 어느 날 집안에서 큰일을 저지른 것이다.

"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당시 아버지가 애지중지 미신으로 섬기던 기구를 불태워 버렸어요. 집안에선 모두들 난리였고 도저히 그대로 집에 머물 수 없었지요."


그는 목사의 주선으로 수원으로 갔다. 고향을 떠날 때 기차역에 배웅 나온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너는 꼭 성경에 나오는 요셉과 같다."며 용기를 줬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파란의 삶을 시작한다. 고아처럼 스스로 성장하며 목사의 도움으로 낮에는 자동차 정비공장에 나가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기독계통학교인 수원 성서고등공민학교에 다녔다. 그는 당시 성장기 때 가장 힘든 것이 배고픔이었다. 야간학교는 오후 4시30분에 시작해 밤 10시 30분에 끝난다. 그러나 제 때에 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자동차공장 사장님이 학교설립과 관계해 그나마 야간공민학교라도 다닌 거지요. 지금은 (학교가)없어졌어요. 주위에선 저를 고아로 알 정도로 집과는 10년 이상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고요. 하여튼 당시 먹는 문제가 항상 골치였습니다."


고교를 졸업 전 그는 이미 1급 정비공장 기술자(자동차 2급 면허)면허를 땄다. 그는 79년 부산으로 건너갔다. 부산에선 82년부터 3년제 신학대학을 다녔다. 군대는 보충역으로 있다가 나중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84년 4월. 그는 24세의 나이로 교회에서 만난 부인 구미영 씨와 식을 올리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자동차 정비공장 면허를 갖고 차 서비스업인 카 센터를 열었다. 고아원에 보모로 일하던 부인 역시 결혼 후엔 화장품가게를 시작했다.
"초보자 어린 부부로 처음 개인사업을 하니 부족한 자금과 경험부족 등 어려움이 많았지요. 그러나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고 아내의 신앙심과 내조 등의 힘으로 잘 견디면서 돈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해 무엇보다 뜻 깊은 일은 그간 떨어져 있던 고향 정선 가족들과 연락이 닿은 것이다. 나중 일이지만 미신에 젖어있던 아버지도 결국은 교회에 나오게 되고 집과는 혈육의 연이 다시 이어지게 됐다.


한편 카센터는 서서히 자리 잡히면서 잘 운영돼 나갔다. 사업규모도 커지고 업체는 세차장이 달린 종합 카센터로 변했다. 그는 카센터 비즈니스로 10여 년간 돈을 꽤 돈을 모았다. 그러나 남에게 속아 큰 실패를 3번이나 했다고 전한다. 그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났으나 마지막 째의 실패는 너무나 큰 아픔을 가져왔다.   

돈을 빌려줬다 떼이고, 허가가 안 된 정비공장을 모르고 속아 샀다 재산을 다 날리는 등 이런 저런 잘못으로 3번을 당한 겁니다. 넘어질 때마다 다행히 하나님이 비즈니스를 회복케 기회를 주셔 고비를 넘기곤 했어요."

난 98년 1월. 그는 부산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해외선교사 신청을 한다. 평소 신앙심이 투철한 그들 부부는 비즈니스 대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의  외국 선교사 활동을 원한 것이다. 만 38세 나이로 그해 8월 그는 어렵지 않게 선원(船員)선교사로 발탁됐다. 부산 한국선원선교회와 소속교회인 부곡동 장로교회에서 공동으로 그들 부부를 선교사로 파송키로 한 것이다. 선교비용은 매달 2천 달러씩 받기로 했다.


“밴쿠버로 닿아 3개월 뒤 쉽게 영주권을 받았고 다시 나중에 캐나다 시민권을 획득했지요. 선교사 역시 처음 하는 사역이라 이민사회와 이민교회 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캐나다 교회 등의 도움으로 전부 극복할 수 있었어요." 밴쿠버에서도 처음 만난 캐나다 목사가 그에게 영어로 선물로 준 이름이 마침 '요셉(Joseph)' 이었다.  

그는 한국 선원들을 만나며 선교사생활을 시작한다. 바다에서 외로움에 지치고 눈물겨운 사연을 지닌 선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6년의 세월을 흘러갔다. 한인교포사회에도 '변상호' 이름 석자 소문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숱한 그의 선행(善行)으로 인해서였다.
자식보다도 오히려 변선교사를 찾는 한인 노인들이 생기고 심지어 변 선교사 집 근처로 이사 오는 교포까지 생겨났다. 변 선교사에 대한 그의 희생적 봉사 얘기 한두 가지를 소개한다.


밴쿠버 시내에서 식품점을 하는 변선교사 이웃집 교포부인이 자녀 3명(9세, 7세, 7개월)을 남겨두고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때 7개월 된 딸을 데려다 1년 반 동안 새 엄마를 만날 때까지 기저귀를 갈아주며 키웠다. 물론 무보수로 행한 선행이다. 


또 어느 교포 박할머니는 갑자기 치매가 왔다. 사람도 몰라보고 소 대변을 못 가렸다. 그 할머니를 두 달간 변선교사 집에 모셔 함께 살며 대소변을 받았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통장을 털어 한국에 가야하는 어려운 교포에게 여비 6백 달러 보태주는 등 그에 대한 일화는 끝도 없다.     


"선교사 일이 뭡니까. 어려운 이웃을 위해 당연히 돕는 게 아닙니까. 선교사로서 한 일이 결코 자랑할 일이 못되지요. 저는 남을 도우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수십 배 더 사랑을 받는 사실을 배우고 있거든요."


그는 또 자신의 자동차 정비기술을 이용해 돈이 없는 사람들 자동차 고쳐주는 일에도 앞장선다. 쉬는 날이면 차 수리 요청이 시간대로 줄을 잇고 있다.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언제나 강원도 촌사람 분수를 잊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변상호 선교사. 그는 선교사의 사명을 고향얘기와 함께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오래 동안 태백선 기차를 못 보았지요. 지금도 고향에는 옥수수가 익어 가는데 그 옥수수가 열매로 농부에게 보답하듯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이 제게 맡긴 일을 잘 지켜나가길 소망할 뿐 입니다." (khsong@kado.net)
      
       
(사진설명)
1. 터키 외항선원들과 선교사 사무실에서 기념사진.
2. 변상호씨 가족 (밴쿠버 주립대학에 재학 중인 외동딸 평화(19세)양과 부인 구미영씨.)
3. 크리스마스 때 정박 중인 선박에 크리스마스 선물꾸러미를 들고 들어가고 있다.
4. 밴쿠버 항에서 배를 탄 변상호 선교사. 입은 옷이 선교사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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