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인사] 백옥빈 여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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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인사] 백옥빈 여사편
  • 안경자(브라질한인회보)
  • 승인 2004.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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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2월 18일. 103명의 한국인은 처음으로 브라질 정부의 허가를 받고 이민의 길을 떠났다. 17세대 가족 92명과 세대주 11명, 합해서 103명. 

전 날에는 브라질 영사 내외, 우리 나라 보사부 장관, 국회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 주최 브라질 이민 환송연이 부산 시내에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11시, 나는 부산항에서 행해진 환송식에서 마지막 부른 애국가를  40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없이는 기억할 수 없다. 아리랑을 부르면서 12시 정각 배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나의 일기장에는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던 부산항의 집들을 안개서린 눈으로 멀리 멀리 바라다 보았다고 써 있다. 그리고 이제 고국을 떠나면서 다시 오기 어려운 마지막 시간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고맙기만 했고 오직 기뻤던 추억만을 간직하고 떠나겠다는 생각뿐이었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3남 1녀를 데리고 이민 길에 오른 우리 내외의 마음은 미지의 땅에 대한 기대로 설레이기만 했다.

안성의 전원도시에서 개업의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식구들이 돌연 이민을 결심하게 된것은 당시 숨막히던 사회상에 기인했었고 꿈과 자유 속에서 아이들을 기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배 안에서의 생활

 이민협회의 인솔자였던 박동열씨는 브라질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해서 브라질의 역사,정치경제, 문화,토속병 ...등을 강의해 주었지만 선박이 항구에 들릴 때마다 칠판에다 그 곳의 지리, 산물, 문화, 화폐, ... 들을 자세히 적어주어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공부가 되게 해주었다.

여러 나라, 여러 도시들을 들릴 때마다 보고 배우는 것이 많았다. 특히 남아프리카의  처음 보는 꽃과 풍물들, 그 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경의로왔었다.

 우리들은 배 안에서 모범적인 단체 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의 일과를 짜고 계획대로 지켜 나갔다.

1. 조기체조  2. 포어 강좌 (혼자 오신 김소령이 맡음) 3. 브라질 강좌 4. 위생과 건강은

남편인 고계순 의사가 맡았다. 한국을 떠나올 때 가져온 의약품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5. 유년반은 대학생이었던 딸아이 고영자가 맡았다.

 우리들은 모두 대한민국 최초의 이민이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대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곧 우리의 행동이 조국을 대표하니 매사 조심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 그래서 매일밤 회의를 가졌다. 배 안에는 주의사항이 붙어 있었는데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되어 있어서 그걸 볼 때마다 국력을 생각하며 한글로도 게시될 날이 와야 한다고들 말하기도 하였다.

한편 네델란드의 선박인 찌짜렌카호는 긴 여행을 위해 많은 이벤트를 가졌다. 영화를 감상하게 하였고,(킬리만자로, 보리수 같은 영화를 보았다) 어린이들에게 선장실의 사령탑을 견학시켰고 2등 갑판에서 경마게임이나 운동회를 열어 주었으며 영국계 여교수에게 운동으로 트위스트 춤을 배우게 하였으며 예술제, 적도제를 열어 주었다.

 

적도제 ---63년 1월 11일

 배가 적도를 지나가게 될 때 적도제(赤道祭)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찌짜렌카호의 1,2등에는 인도, 일본,영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우리는 3등칸 손님.

그런데 적도제란 무엇인가?

 --적도 나라에 왕이 있었다. 왕이 생각하기에 인간들이 여간 괘씸한 것이 아니다. 제사도 없이 슬쩍 지나가려고?  아니 무사히 적도를 지나려면 마땅히 내게 인사도 하고 부탁도 하고 그래야지 그냥 가다니...이놈들. 화가 난 왕은 경찰을 시켜 인간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잡혀 온 인질들을 바다에 제물로 바친다.

 1,2등 선객 중에서 적도의 왕과 여왕을 뽑고, 3등실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중에서는 나머지 배역, 경찰, 여왕의 시녀(어린이들이 맡음), 제물로 바쳐질 남자 등 여러 명을 뽑는다. 몸에다 인디언 그림을 그린 사람, 경찰을 그린 사람들...배역을 맡은 사람들은 제물로 바칠 사람들을 잡아서 바다, -실은 갑판에 있는 수영장-에 던지는 데 이 모든 일들은 무언극으로 진행된다. 

평상시 3등칸의 여객들은 사용하지 못하던 풀장에서 마음껏 수영을 했다면서 온 몸에 물감을 칠한 애들은 원기백배 너무들 기뻐했다. 나중에는 선장, 여왕, 의사, 경찰, 구경꾼들까지 모두 풀장에 집어 넣어 수라장이 되었지만 국적없는 하루를 즐겼던 축제의 날이었다. 다음 날 우리들은 선장이 싸인한 <적도 통과증>을 받아서 더욱 의미있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예술제 --- 63년 1월 15일

약 두 달간의 긴 바다 여행, 나는 멀미로 인해 10킬로가 빠질 정도로 심한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웬만한 배의 행사에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각 국의 민속과 음악 등을 소개하는 예술제의 날에는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배웠던 딸 영자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로 하고 아이들은 LP판 틀어 놓고 우리 민요 동요를 배워서 불렀다. 나는 사범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율동으로 배웠던 고전무용 '노들강변'을 추기로 하였다.

  아코디언의 반주에 맞춰 한복을 입고 멀미로 피골상접이 된 채 나는 우리의 고전무용을 추었다. 한복도 한국춤도 처음 본 외국 동선자들은 사진 찍노라 야단이었다. 실은 멀미로 고생 중이어서 춤을 출 수 없음을 호소하니 선장이 2등실에 와서 좀 쉬면 괜찮을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과연  2등실은 에어콘도 있었고 조금도 어지럽지 않았다. 아이스크림까지 대접 받고 자연 기운이 솟아 춤을 출 수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일기로 사상계에 연재되어 나가자 후속 이민 팀들은 고전무용을 배워 온 사람들이 많았다.)

1월 17일 배는 대서양상의 한 아름다운 섬 모리샤스에 닿았다. 9일 동안이나 망망대해만 보아오다가 뜻밖에 만난 그 섬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흑인같은 원주민이 아니고 백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박물관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풍광과 조용한 분위기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오후에는 일을 하지 않았고 할머니들도 예쁘게 옷을 입고 있었으며 모든 물건들이 서양의 것이었다.

 

운동회 ---2월 1일

 1월 28일에는 일본인과 한일 친선 탁구시합이 있었고, 2월 1일에는 운동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17세 이하의 청소년들만 참가하였으나 나중에는 어른들은 물론 선장까지 끼어서 오랜만에 신나게 몸을 풀게 되자 모두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운동회는 2등 갑판에서 거행되었는데 달리기, 빵 따먹기, 큰 물통에 있는 사과 따먹기, 자루 속에 두 발 넣고 토끼 뜀 뛰기, 2인 3각......

54일간의 긴 여행, 우리들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김중혁씨 딸이 우리들의 이발을 맡아 해주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코디언에 맞춰 노래를 부를 때나 레코드로 한국 민요를 들으며 향수에 젖기도 하였다. 후에 박동진 대사로부터 김중혁씨 따님, 고계순 의사 등 몇 분이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민선을 타고 오면서 우리는 첫 이민이었기 때문에 대접도 받았고 우리 자신들도 조심을 하였지만 사실 편안한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60년대 초 이민을 결심했었던 일이며 배 안에서 동고동락했던 그 때 그 사람들의 기억이 어제 일같이만 느껴지는데 세월은 흘러 계산을 해보니 40년도 넘었다.

 브라질 땅, 리오항 도착 순간

 전날은 유난히 달이 아름다웠다. 갑판에 나가 이민오는 일본인들과 이야기 나누었다. 그들의 여비는 10년 상환으로 정부가 대준다고 하는 것을 듣고 우리 정부도 그렇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땅도 많이 사고 농민들 많이 데려올 수 있을 텐데...목적지에 가까와 짐에 따라 주의사항을 들으며 짐을 싸려니 초조와 희망이 교차하고 고생은 이미 각오했지만 끝내 피어 오르는 불안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저녁 5시 갑판에 올라 멀리 뿌옇게 다가 오는 리오 해안을 바라보았다. 작은 돌섬들이 가까이 온다. 처음의 무감각한 마음이 점점 뛰기 시작했고 꼬빠까바나, 뻥데아수까봉(Pao de Acucar) 그리고 천주교 나라답게 나에게 오라는 듯한 예수 십자성상이 저녁 햇빛 속에 장엄하게 나타나 보였다. 우연히도 라디오에서 아베마리아가 흘러 나왔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자 합니다. 주님, 저희들을 보호해 주소서. 이끌어 주소서."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정각 7시 닻이 내려 졌다. 얼마 후 어둠을 뚫고 검역관과 세관원을 실은 작은 배가 왔고 그 뒤를 이어 오는 또 다른 배, 박동진 대사님과 먼저 와 있던 몇 식구들이 타고 있었다. 나라의 귀중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대사님이 베푸는 리오 관광을 종일 하고 산토스로 향하였다.

 

산토스항에 도착, 이민 수용소로

 1963년 2월 12일 우리는 산토스항에 도착하였다. (그 도착 날짜를 내가 잊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그날이 딸아이의 생일날.) 지난 번 김창언씨의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말할 수 없는 기대와 불안에 휩싸인 우리들을 반공포로 출신들로 이 땅에 먼저 와 있던 젊은 동포들이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대거 산토스항으로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낯선 땅에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의 영접을 받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갈 농장의 지권이 확실치 않았고 실제 농사질 수 있는 땅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모두 이민 수용소에 들어 가야 했다. 그런데 그 날 나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미다상의 따님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영자를 위해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가지고 온 일이다. 촛불을 켜고 축하노래를 불러주던 그 식구들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눈물이 앞선다. 언제 어디서나 선한 일은 감동을 준다. 정말 좋은 사람들. 우리 한인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선한 마음을 가진 가족이다.

 수용소의 대우는 최고였다. 남녀 별로 나뉘어 졌고 한 사람에 한 대의 깨끗한 침대, 매일 고기와 채소, 과일이 마음껏 먹게 나왔다. 물론 무료. 이런 대우는 외국 이민자와 유학생에게 해당되었고 자국의 이주자들에겐 한 방에서 여럿이 같이 기거하게 했다.

그런데 그 수용소에서 정말 경사가 있었다. 1963년 5월 4일, 양승갑/황금옥 내외가 득녀를 한 것. 예쁜 딸 HELOISA!  이분들은 5월 중순 ITO GRANJA 양계장 육종연구소에 취직하여 미국손님을 위한 영어 통역, 번역일과 총무과 사무원으로 내외가 한 3년간 일하였다. 그 후 이불 제조업을 하여 일본인들에게 팔았고 80년도에는 보석상을 열었다.

 

수용소에서 농장으로

 1. 1963년 3월 18일, 17세대 중 5세대(고광순, 한춘교, 고계순, 서재욱, 안계승 그리고 17세의 아들고홍일이단신 합류)는 썽빠울로 50KM지점의 과라레마(GUARAREMA)땅, 아리랑 농장으로 출발하였다. 일본인이 농사짓던 헌 집에 임시로 들어 터를 갈고 우물을 팠다.

2. 김덕조씨는 오빠인 김수조씨집으로 들어 갔고, 윤명섭씨는 일본인 버섯농장으로

3. 안계승씨 여동생 안까따리나는 수녀가 될 희망이 있어서 수녀님과 함께 계속 수용소에서 있었다.

4. 우리 가족은 3월 24일 큰 아버지(고광순씨)와 함께 개인집으로 이사 나갔다.

5. 동서지간이었던 유재선,장상기씨 두 댁은 4월 3일 비아 아냥게라(VIA ANHANGUERA-24km 지점) 일본인 농장으로 농사 견학차 고용 입주하였다.

6. 장상식, 박응호, 김소령 등이 아리랑농장으로 입주

7.  4월 하순경, 한승일, 안동협, 김중혁, 김상진, 서재성 제씨는 26km지점 "NOVA BOM JESUS" 의 땅을 빌려 입주 서울농장을 만들다.

8. 김승한, 김상진씨는 후에 도나 까따리나농장(70KM지점)으로

9. 박선관,김해곤씨들은 빠라나주 이따라라농장으로 가서 양계장을 하였다.

이처럼 첫 이민자들은 과거 농사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정부와의 약속과 한국의 이미지를 생각하여 농장으로 뛰어들어 2,3년간 농사일에 매진했었다.

그러나 자금난과 노동력 부족,자녀 교육의 문제 등의 현실적 난제에 부딪쳐 결국 고생만하다가 썽빠울로로 나오게 되었다.사실 아침마다 마차로 이 집 저 집 들려 아이들을 싣고 읍내 학교로 데려가면서 모두들 아이들의 장래에 회의를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민 그 삶의 모습

 우리 가족은 이민 수용소에서 한 달간 머물며 종일 집과 농장을 찾아 다녔다. 남편은 의사시험을 치루어야 했었기에  농장 찾는 일 대신 싼따 까자 병원에서 자원 봉사로 의료일을 했다. 외과 제 3연구실에서 수술 잘하던 외과의가 남편의 수술을 보고 무척 놀래고 좋아하며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고 그 분의 소개로 헤시피에서 의사시험을 치게 되었다.

합격하자 "만세! 다 끝났다."라는 전보를 받았을 때가 어제 일만 같다. 갈 때는 비행기로 갔는데 올 때는 버스타고 브라질을 알아야 한다며 4일간을 걸려 왔던 남편은 마치 군대 갔다온 사람같은 긴장한 모습이었었다. 그 때 나이 48세. 빌라까헝에 개업을 하고 첫날 왕진 갔다 받은 치료비 20원을 감사헌금하며 감격스러웠던 일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지금 왜 좀 더 그를 기쁘게 해 주지 못하였었나 가장 가슴 아픈 후회에 빠지곤 하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의사 시험 보기 전의 일이다.  병원에서도 포기한 한 레바논 환자를 남편이 고쳐 주자 그 형이 고마움에 여러 가지로 우리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약국 개업도 그 중의 하나.

하루는 느닷없이 약국 입구 양쪽에 군인들이 떡 버티고 섰다. 뒷문에도 역시. 혁명은 났다고 하고 도무지 뭘 알 수도 없는데 얼마나 겁이 나던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약국으로 웬 중국사람이 들어 갔다는 정보를 받았다는 것. 우리가 새로 이민 온 동양인이어서 생긴 잘못된 정보였지만 반공 군사혁명이 발발한 것. 브라질이 어수룩하지 않다는 것을 그 때 실감하였다.

 

마음에 오가는 상념들

 이민의 나날 중에서 가장 기뻤던 일을 떠 올려 본다. 애들이 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아빠의 의사시험 합격 전보를 받았을 때, 집을 샀을 때, 함신부님이 처음으로 우리 말 피정을 주셨을 때... 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그럼 후회되는 것은? 자문해 본다.

과연 아이들을 위해서 이민 온 것이 잘 한 것인가 종종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빨리  경제적 안정을 갖기 위해 아이들을 너무 자유스럽게 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창 자랄 나이, 내적 성장에 에미로서 등한했던 것은 아니었나?  

그 동안 열심히 사노라 했는데 과연 옳게 살았는지...어느새 40년을 지내고 보니 좀더 잘 살아내지 못했던 것이 못내 후회스럽기만 하다. 인생의 선배로서 이민의 선배로서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예의 바르고 하느님과 부모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라고 부탁하고 싶다.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말고 사랑으로 참으면서 약간은 엄하게 키우는 것이 좋다. 아무쪼록 하루에 한 번 씩은 가족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같이 식사하도록 하는 것을 진심으로 권한다.

 

백옥빈 여사는 1923년 생. 경성사범(현 서울대 사대) 졸. 당시 유명 월간지 <사상계>로부터 해외 특파원의 자격을 받고 계속 이민일기를 전송 게재하였다. 그일로 지금까지 일기쓰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을 감사한다고 하며 요즘은 어머니 합창단의 활동을 접고 자기 성화, 타인 전교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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