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인사]한인 사회 복지재단을 꿈꾸며
상태바
[이야기 한인사]한인 사회 복지재단을 꿈꾸며
  • 안경자(브라질한인회보)
  • 승인 2004.10.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창득 편

1. 결혼 60주년을 맞는 마음

6남매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35명의 식구들, 30분 지역 내에 있기 때문에 5분 내외 사이로 금방 모여 한 방이 된다. 미국에 가서 살겠다고 한 애들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산 가족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렸다. 막강한 열량(熱量), 6남매의 에너지, 이들끼리 사업하면 그 대단한 힘으로 무엇인들 안되리.

여기서 번 돈 여기에 투자해야 된다. 왜 미국으로 가져 가려 하는가. 그런 사람들이 밉다. "여기까지 와서 이산가족 되지 말고 뭉치며 살자. 뿌리 내린 곳에서 활짝 꽃 피워 열매 맺도록 하자."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는 정월이면 회혼(回婚)이 된다. 처가 열 일곱에 결혼하여 내년 1월에 일흔 일곱이 되니 우리 부부 결혼한 지 만 60년, 내 소원이던 복지재단. 사위인 GWI 유무학 사장이 만들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오랜 세월 일본인들과 일을 하면서 나는 그들 이민사회의 이모저모를 보게 되었다. 가장 관심있게 본 것이 복지사업. 그 사업들이 어떻게 흥성하다 어떻게 소멸해 가는 지를 보았다.

꼬찌아 산업조합, Sul Brasil 산업조합, 남미은행, 원호협회... 이런 쟁쟁한 조합들이 2세들 대에 와서 망가진 이유는 한마디로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것이 원호 협회인데 어떻게 해서 살아 남았나? 오래 전서부터 일본 문회회관 아래층에다 종합 진료소를 차리고 의사들이 자원 봉사로 브라질 빈민을 위한 자선병원을 해 왔기 때문이다.

연회비 40헤알 내고 회원이 되면 6개월부터 특혜를 준다. 저렴한 값으로 진료받을 수 있다. 나도 늘 이곳을 이용한다. 현 회원 15.000명, (금년 목표 16.000명) 총 60만 헤알로 운영이 된다. 원호협회회장은 91세 되신 분. 먹고 살면 족하지 않느냐고 한다.

우리도 이런 복지 재단과 복지병원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되겠지. 아니다. 꼭 이루어 져야 한다. 훌륭한 한인 의사들이 많고 모두들 생각이 같으니 의지만 있으면 된다. 시작하면 된다.

 브라질에서 산지 40년, 살아온 나날들을 자꾸 돌아보는 나이이다. 내 고객은 일본인이고, 내 물건을 팔아주는 그들이 고마워 나는 일년마다 일본 원호협회를 방문, 진료에 써달라고 작은 마음 봉투에 담아 내놓곤 한다. 이들은 "우리도 안 하는 일, 한국인이 한다." 고 신문에다 내며 인사를 해온다.

원호협회는 리베르다지의 작은 진료소를 기점으로 점점 커가서 지금은 과률류스에 어머어마한 종합병원을 지니게 되었고, 브라질 요소요소에 양로원, 요양소, 호텔 등을 가지게 되었다.

과룰류스 병원 개업식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일본 황태자가 방문 온다고 싸르네이 대통령까지 왔었다. 그 병원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었는지... 모든 검사를 위한 최신 시설을 갖추고 번창일로에 있는 과룰류스 병원, 왜 우린들 못하겠느냐. 작은 진료소가 대종합병원이 되었듯 우리도 작게나마 출발하여 어려운 이민 선구자들의 여생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원호협회로, 의지가지 없는 노인들이 정답게 모여 살 좋은 환경의 집을 마련해 주는 복지사업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이런 꿈을 사위들이 절대 지지하며 격려해 줄 때마다 힘이 솟는다.

2. 브라질 정식비자로 온 이민

우리는 정식의 이민 영농비자를 받고 브라질에 온 제 1호, 소위 <68세대> 이다. 그러나 1964년 3월 18일 부산항에서 찌짜렌카호를 탄 68세대는 사실 68세대가 아니었다. 어찌된 걸까? 그 내용은 이랬다.

처음 이민의 결심은 문화사절단 단장 정인규 대령에게서 브라질의 이야기를 듣고 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전가족을 데리고 이민 나가는 길이 전혀 없었던 때, 정식으로 비자 받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은 너무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민 결심한 사람들은 서둘러 서류를 만들었는데 정인규 대령은 군인이었던 관계로 아무래도 일이 거칠고 법이용을 제대로 못한다고 판단이 되어 수원 농대를 나와 사업을 하던 이성용씨가 직접 브라질로 와서 현지에서 비자 문제를 알아보고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개척지를 매입하지 않고는 비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브라질에 온 이성용씨는 비토리아의 히바다비아라는 변호사의 개인소유지를 매입, 그것을 토대로 해서 이민비자를 추진하였다. 당시 리오에 있던 초대 브라질대사(박동진)가 이성용씨에 협조하여 법적으로 완전한 비자를 받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한국에 공관이 없어 일본 고베 총영사가 서울에 나와 비자를 주었다.

이러다 보니 2,3년이란 세월이 흐르게 되었고 곧 간다 곧 간다 하는 바람에 집도 팔고 사업체도 정리하고 이렇다 할 소식은 없고.... 점차 소진된 데다가 135원하던 환율이 255대로 껑충 뛰어버리자 막상 배를 타게 되었을 때는 처음의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던 것. 배 삯 때문에 가족의 일부만 오는 집, 뒤쳐지는 집..그래서 결국 첫 배를 탄 이민은 45세대가 되었던 것이다. 

 1964년 5월 15일 비토리아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은 고급 공무원. 장교를 지낸 이들의 가족이 주류,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브라질에 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간 수술을 받아 통원 치료 받을 때라 모친과 처, 2남 4녀 8명이 비토리아에 떨어졌으나 토지 구입 계약금 500불 포기하고 처는 식구들을 데리고 썽빠울로로 나왔다. 가장이 올 때까지 10개월간 Rio Piquena에서 살았다.

  나는 10개월 후 브라질에 왔다. 지금도 그 날 공항 꽁고냐스의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유난히 날이 좋았다. 가장을 맞기 위해 나와 있는 식구들을 본 순간, 열 달 동안 가장 없는 노약자 내 가족을 받들어 준 브라질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나도 모르게 맹세를 하였다. "절대 이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 절대 브라질을 저바리지 않겠다."라고.

내가 도착하자 우리 식구는 깜삐나스로 이주, 정착하게 되었다. 교육도시라고 이름이 난 도시. 우리 나라에서 이주비로 허가해 준 돈은 1인당 정착비 포함 300불.그 때 맏이는 고 3 졸업반, 막내가 한 살, 우리식구 아홉은 3천불로 고된 생활을 그곳에서 시작하였다. 아니 멋진 고생을 시작하였다. 이민 오기 전 나는 수원여고, 수원 농림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서울의 화신 산업 박흥식씨와 연계된 사업을 하였었다. 무서울 것이 없었던 때.

처음 처는 과일 가게를 열고 같은 곳에다 나는 만물상(Armazem) 을 열었다. 아이들 6남매는 어머니(당시 56세)가 맡으셨고 팔다 남은 과일은 애들 먹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애들이 모두 할머니를 지금도 극진히 모시는 까닭은 자기네를 길러주셨다는 그 고마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내 집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의지하여 점포도 집도 얻게 되니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과거에 고생을 했던 터라 올바른 지도를 해 주어 우리는 이 땅에서 실수 없이 살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우리는 깜삐나스에서 살았다.

 

3. 깜삐나스 탁아소와의 인연

 시장 안에 단신으로 온 소련사람이 노처녀와 결혼하였는데 그 부인이 변두리 학교 교장이었다. 그 분이 결식(缺食)아동 이야기를 하며 늘 우유와 세제(洗劑)가 모자란다고 말하길래 한 번 찾아가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연말이 되자 난 차를 빌려 우유, 설탕, 가루비누 등을 싣고 가서 학교에 주고 오니 늘 공짜밥 먹는 기분이고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던 마음이 푸근해지고 얼마나 홀가분한 지 이제야 사람 구실 하는 것 같고 대단히 가벼워 졌다. 아이들과 집 사람은 숟가락 짝도 안 맞는 살림에 그런 일 차차로 하지않고 왜 그랬냐고 불만이 많았으나 "아니다. 생각날 때 해야  된다." 하며 계속해서 매년 도왔다.

그러던 차에 세월이 흘러 어머니 환갑이 되었다. 한국이라면 크게 잔치를 할 텐데...마음이 착잡해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시의 복지협회를 찾아갔다. 마침 일본인 2세가 보건사회국장(여자였었다.)의 비서로 일본말을 곧잘 하길래 내 모친이 환갑이 되셨는데 그 기념으로 탁아소에 필요한 것을 기증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고 정식 허락을 받게 되었다.

금요일마다 오후에 가게를 애들에게 맡기고 S.P로 나와 냉장고, 부억용 취사도구,놀이터 기구 등을 공장도 가격으로 구입하여 그 목록을 비서에게 알렸다. 깜삐나스엔 부자도 많은데 누구도 안 하는 일을 한국인 한 가족이 한다며 그 보고가 시장(당시 Quercia)에게까지 올라갔다. 꿰르시아 시장은 공식적인 기증식을 해야 한다고 한국 총영사에게 초청장을 내는 것이 아닌가 ?

이윤희 초대 썽빠울로 총영사는 대단히 기뻐하며 깜삐나스 시를 방문하였고, 그 자리에서 시장은 제일 큰 탁아소에서 기증식을 가질 것과 현판을 붙일 것을 발표하였다. 어머니 이름 <CHS IL SOON>-차일순이라는 현판을 붙이는 자리,

양국기 아래 엄숙한 기증식을 하던 그 날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이런 영광된 자리에 아버지가 계셨으면 해서 흐느끼시고 외아들인 나 역시 참을 수 없어 양복에 눈물을 떨구니 이를 본 보건사회국장도 막 울고 -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1970년도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 깜삐나스에 새 탁아소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한 신부가 기증 받았던 땅을 다시 시에다 기증하고 시에서는 거기에다 탁아소를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다. 인구는 자꾸 늘어가는데 일하러 나가는 영세민들은 어린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안타까워 하므로 탁아소는 있을 수록 좋았다. 어린 애들은 탁아소에 가는 것을 더 좋아 하였고 엄마가 데리러 오면 더 있겠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시에서 초청장이 왔다. 새 탁아소의 이름을 <Center Crianca- Cha Il Soon> 이라 하자는 안이 시의회를 통과했다며 낙성식에 참가해달라는 것이었다.

총영사 (문희철)에게도 공식적인 초청장이 갔다. 낙성식은 굉장했다. 기자들, 내외 귀빈들. 거기서 내가 낙성식 테이프를 끊은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다시 현판 제막은 아들인 나보고 하라 하고 홀 중앙의 어머니 초상화 제막은 며느리인 처가 하도록 권해오니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하찮은 일 조금 한 것으로 이런 대우 받는가 싶어 송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문희철 총영사까지 내게 인사를 하니 점점 더 부담이 되어 나중에는 괴롭기까지 하였다.

탁아소와 우리집과의 인연에 요즘 얘기 하나가 더 있다. 그 얘기로 마무리하자.

깜삐나스의 한 젊은  신문기자가 몇 개월 전 하나의 의문을 기사로 썼다.

정부의 공공건물에 <Cha Il Soon> 이라는 외국인 같아 보이는 이상한 이름이 두 군데 씩이나 붙어 있는데 그 사유가 무엇인가? 시 보건사회국에 알아보았으나 아는 사람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내용이었단다. 마침 현판식 당시 사회국 직원이었던 한 노인이 그 기사를 읽고 그 기자에게 자기가 젊어서 근무할 때의 이야기 자초지종을 알려 주었다며 내게 신문과 함께 사연을 보내 왔다.

사연을 들은 기자는 사과 기사를 냈는데 거기 써 있기를 "이것이 동양 문화이다. 기부한 사람은 아들, 그러나 어머니 이름으로. 이것은 우리에겐 없는 일이다."

 

4. 브라질 대사 수원 방문하다.

 작은 도시 수원에 브라질 대사가 왔었던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1978년도, 한국에 나갈 기회가 생겨 고향 수원에 갔던 때 있었던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동창이 교감이고 교장이 신부님인 초등학교에 가서 내가 살고 있는 브라질이 천주교 나라이니 자매 결연을 맺으면 어떠냐고 제의를 하면서 적은 돈이라도 모아주면 거기에 내가 더 보태 한국제 문구와 완구를 마련하여 브라질로 보내겠다는 계획안을 냈다. OK.

의외로 성금은 많이 걷혔다. 나는 신이 나서 문방구 수출조합을 통해 공장도 가격으로 사서 많은 물량을 선적할 수 있게 되었다. 샘플들은 따로 빼어 학교로 가져가는 한편 서울에 있는 브라질 대사관에 가서 이러이러한 기증식에 참여해 주시면 영광이라는 말씀을 드렸더니 당시 Lauro대사는 두말 않고 가겠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시골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놀랜 교장 신부님은 주교님과 시의 높은 사람들을 다 초대하였고, 경찰서장은 수원시 언덕에서부터 대사 차를 양쪽에서 에스코트하여 교정까지 모시니 그 모양이 장관이었다.

나 역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대사관 근무하는 이를 독려하여 감사패를 만들었고, 대형 태극기 크기의 브라질 국기를 제작하여 대사차가 교정에 들어 올 때에는 양국기까지 휘날리게 하였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노력보다 더 놀라운 일이 기증식 때 벌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브라질 노래 <RIO BONITA>를 합창하는 것이 아닌가? 대사는 감사패를 증정하며 너무 놀래고 기뻐서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는데 그 날의 사진이 경기도 화보 표지에 크게 실렸었다. 그리고 그 짐들을 대사관 이름으로 붙이도록 해주었다.

   5. 한인회관 마련의 약속

 짐들이 도착하자 깜삐나스 시에서는 너무 놀래 이 귀한 선물들을 어떻게 받느냐? 그럴 수 없다.  한국 총영사가 와서 직접 나누게 해달라고 요청, 또다시 기증식을 가지게 되었다.

 장기안 총영사는 인사말에서 “우리는 6.25 전쟁을 치루고 국제 연합의 도움을 받았었다. 이제 조금씩 나아져 남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이 두 나라 우정의 가교를 만들어  서로 돕고 지내자.??는 요지의 말을 하니 또 다시 감격한 사회국장 또 울고 우리 가족도 울고, 참석한 사람들이 다 울었다.

총영사는 이런 감격적인 장면 처음 보았다며 썽빠울로로 돌아오는 길에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 한인들의 삶을 위해 한인회관이  필요하다고 하며 꼭 만들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장총영사는 약속대로 직접 발벗고 나섰다. 총영사가 상가를 돌며 한인 교포들에게 호소하였다. 역대 총영사들이 부임하면  의례 한인회관 마련하겠다고 하였었는데 이 분은 실천한 것이다.

당신의 월급을 털어냈고 우리가 마음을 내야 한다며 영사들도 월급에서 떼냈다. 총영사는 동냥 다니 듯 다니며 때로는 불쾌한 일도 겪었지만 원로들이 손수 와서 최고 금액들을 주시니 위로가 된다며 열심히 다닌 끝에 드디어 회관을 마련하게 되었다. 

6. 시계탑 건립 이야기

Aclimacao 공원에 시계탑을 한인들이 기증했다는 소식을 듣고 루스공원 책임자가 우리 공원에도 해달라고 불평하듯 요청하더란 말을 듣자 얼른 "해주자." 하고는 여럿이 해야 뜻이 있으니까 이선명씨를 찾아가 의논을 했다.

시계회사에 전화하니 곧 30% 오른다기에 급한 마음에 우선 두 개를 샀다. 그리고는 허가를 맡으려 하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Aclimacao은 시 소관이고 Luz는 연방정부 소속(연방 박물관소속)이랜다. 연방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이 복잡해졌다. 연방정부에서도 nao, 박물관 관계자도 nao이라는 거절회신이 왔는데

박물관과 관계가 없는 것은 어떤 것도 nao 이란다. (하기야 GWI가 루스 공원에 쓰레기 통을 설치해 주는데 1년 반이 걸려 허가가 나왔다.)

그래서 브라스의 한국광장에 시계가 없어졌길래 잘 됐다.그 곳에다 세우자고 했더니 이번엔 SP시가 광고회사와 계약이 되어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현금으로 만 불이나 되는 금액을 지불했는데 정말 난감해졌다. 이 때 떠오른 것이 시계공장이 깜삐나스인 것.

그 곳 교포에게 시계탑 기증여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실무자가 대 환영이라는 회답이 왔다.

인연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애들 잔뼈가 굵은 제 2의 고향, 깜삐나스 대공원에 하나, 번화가에 하나, 허가가 나와서 지금 전선 끄는 공사가 한창이다.

생각만해도 즐겁다.

이민 40주년 기념으로 태극기, 브라질 국기 넣고 시계탑 기증식을 하자. 공관에서도 가고 한인회에서도 가고, 아들 며느리 사위 딸 손자들 데려가 보일 것이다.

브라질이 우리들을 품에 안아 길러주었으니 그 안에서 편안히 자란 우리들, 보은하며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돈을 벌면 쓸 줄 알아야 하고 원로들이 그 본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 우리 문화가 빛나게 되고 우리 한인들 후손이 대접 받고 살게 된다.

지금의 우리가 거름이 되어 주어야 한다.

 

7. 68세대를 생각한다

 

도착 10주년이 되던 74년도에 68세대가 한 자리에 모였었다. 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50여일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우리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브라질의 미래 앞에서 서로 의지하며 또한 희망에 차서 앞날을 이야기하던 우리들, 10년 만에 만난 자리, 서로 껴안고 그 동안의 사정 물을 새 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친척보다 더 가깝고 더 반가운 68세대.

15주년 되던 때도 모였었는데 그 후 맥이 끊어졌다. 자꾸 가시는 분이 생기니 자주 만나 보자고 1.5세대에게 주선하라 했으나 그게 안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나서 뭐 하느냐? 자조적(自嘲的)인 분도 계시고 실제로 나오시기 힘든 분도 계시고, 회비는 내겠다. 그러나 나오고 싶지 않다 하는 분도 계신다.

작은 모판에서 넓은 땅으로 옮겨 심을 때에는 물주고 거름 주고 보살 필 의무가 있다. 돈은 목표가 아니다. 어떻게 좋은 가정 꾸미고 사회에 기여하며 살아 가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68세대 가운데는 의사,변호사, 엔지니어, 교수, 사업가....를 배출시킨 댁들도 있고, 소식이 끊긴 댁도 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우리 한인 사회에 복지사업이 활성화 되어 이민 선구자들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감싸 안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