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서 조유행 전 하동군수 초청강연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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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서 조유행 전 하동군수 초청강연회 개최
  • 김운하 해외편집위원
  • 승인 2019.04.2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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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군수로 일하며 청백리 표상으로 알려져…그간 경험 오스트리아 동포들과 나눠
▲ 재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는 4월 20일 오후 7시 비엔나 한인문화회관에서 조유행 전 경상남도 하동군수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단체사진 (사진 김운하 해외편집위원)

재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회장 정종완)은 4월 20일 오후 7시 비엔나 한인문화회관에서 조유행 전 경상남도 하동군수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조 군수는 세 번 연속 군수에 당선되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 재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는 4월 20일 오후 7시 비엔나 한인문화회관에서 조유행 전 경상남도 하동군수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인사말하는 정종완 재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장 (사진 김운하 해외편집위원)

정종완 재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장은 개회인사를 통해 “몇 년 한국방문 시 청렴행정 심사에서 임기 12년 동안 여러 차례 전국 최고 점수로 청백리상을 받은 조 전 군수의 공직경력을 접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의 자랑 나의 삶, 지방 10급 공무원’이란 제목으로 강연에 나선 조 전 군수는 “국회의원을 그만두면 개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라며 “처음에 정종완 회장님이 초청하셨을 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사양했지만 이후 다시 초청해 주실 때 그 순수함이 마음을 감동시켜 이 자리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경남 하동군 황천면에서 퇴직 공무원의 9남매 중 넷째로 1945년에 태어난 조 전 군수는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부친으로부터 한문교육을 받은 것이 후에 큰 도움이 됐다. 

우등생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으로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그는 한 해를 쉬고 1년 후 담임도 아니었던 박소희 교사가 이 소문을 듣고 도움에 나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조 전 군수는 22세 때 고향 면사무소의 9급 공무원이 됐다. 그는 “돈과 빽이 없는 저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다짐하면서 어느 누구 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목표 삼았다”고 이 때를 설명했다.

▲ 재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는 4월 20일 오후 7시 비엔나 한인문화회관에서 조유행 전 경상남도 하동군수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하는 조유행 전 경상남도 하동군수 (사진 김운하 해외편집위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 밤늦게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군수 생활 12년 간은 ‘새벽 4시 반 기상-1시간 산보-목욕-아침 7시 40분 등청’을 일과로 삼았다. 자녀들과는 눈 맞출 시간이 없어 일요일에만 만났다. 자녀들 돌봄은 모두 아내 노쌍옥 씨의 일이었다.

조 전 군수는 공직 생활 중에서도 배움에 힘썼다. 통신대학을 졸업하고 창원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임기 말년에는 부산 동명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 까지를 받은 평생 학생이었다.

조 전 군수는 ‘오늘의 나를 만든 7가지 엔진’ 중 처음으로 첫째로 꿈을 들었다. 그는 하동 사람들이 고향을 하동이라고 하지 않고 이웃에 있는 큰 도시 진주라고 말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낙후된 하동을 잘 사는 고장으로 만들자고 하는 꿈을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평생 노력해왔다고 했다.

그는 공직자의 자세를 들고 청렴, 겸손, 겸양, 말조심, 하급자 사랑, 인사공정, 단신으로 관내시찰, 사택방문 일체사절 등이 포함된다고 했다. 이런 자세로 반부패상과 청렴상을 6년 연속으로 수상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소통과 군민사랑, 학습 계속의 시대정신 파악, 머리맡에 항상 필기도구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발상을 메모하는 ‘적자생존법’, 고독한 결단이 자신을 만든 동력으로 들었다.

조 전 군수의 행정목표는 ‘천부농만부촌(千富農萬富村)’으로 1억 원 이상 농가소득을 올리는 1,000가구를 만들고, 하동군 내 10,000가구의 농가소득을 4,500만원으로 끌어 올린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행정 목표가 상당 수준 달성되자 그의 명성은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어 조 전 군수는 ‘어떤 군수로 기억되고 싶나’고 자문하며 첫째 ‘검소하고 조심성을 지킨 군수’, 둘째 ‘욕 먹을 각오로 미래를 위해 일했던 군수’, 셋째 ‘퇴임 후에도 군민들과 동고동락했던 군수’라고 답했다.

후회스런 일 세 가지로는 “가정과 가족을 포기하고 공무에만 매달렸던 것, 퇴임 후의 생활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 휴식을 모르고 취미생활 하나 준비하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그는 “다시 태어나도 일에만 몰두했던 이런 남편, 이런 아버지가 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는 남편,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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