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프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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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프다’의 세상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9.03.1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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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프다’라는 말은 우리말에 없는 단어죠. 정확하게 말하면 ‘슬프다’나 ‘아프다’ 속에 들어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원래는 ‘프’가 아니고 ‘브’입니다. 앞 받침의 히읗이 연결되어 ‘프’로 발음 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앓다’에 ‘브’가 붙어 아프다가 되고, ‘슳다’에 ‘브’가 붙어 슬프다가 된 겁니다. 그런데 ‘프’로 발음되는 말을 보다가 그 속에 힘든 감정에 대한 어휘가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통점입니다.

물론 아픔, 슬픔, 배고픔 그리고 하고픔. 모두 우연의 일치일 겁니다. ‘픔’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단어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음은 우연으로 볼 수밖에 없겠죠. 주로 세상을 살면서 안 만나거나 덜 만났으면 하는 말에 ‘픔’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안 만날 수는 없겠죠. 안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소망이니 품지도 말아야 할 겁니다.

아프지 않고 자라는 경우가 없고, 슬프지 않고 기쁨을 알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말해서 배고픔보다 맛있는 반찬이 없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시장하면 정말 밥이 꿀맛입니다. 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배불렀을 때는 먹기 싫은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배가 고프면 뭐든지 맛있다는 말은 한편으로 슬픔과 아픔에도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아픔이나 슬픔은 지금은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처절하게 아파본 사람이 행복을 압니다. 아이들은 아프고 나서 한 뼘 더 자라납니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늘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기가 말을 하기도 하고, 걷기도 합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경험담이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아픔이 더 큰 문제로 자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성장을 위한 아픔인지, 더 큰 고통의 예고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점은 우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줍니다. 아이가 큰 병에 걸린 사람에게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도움이 안 되는 위로일 겁니다.

슬픔은 경우가 좀 다릅니다. 다시 마음이 회복되는 슬픔도 있지만 그 자체로 끝인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와의 영원한 이별은 말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하지만 슬픔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커진다는 점은 슬픔이 주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끝 간 데 없이 슬퍼본 사람이 세상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러지 않고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요즘 주변에 힘든 사람이 참 많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슬픔과 아픔이 한 가득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에 눈물이 흐릅니다. 가장 좋은 위로는 같이 울어주는 것임을 압니다. 흐느끼는 어깨를 토닥이고 감싸주는 것 만한 위로가 없을 겁니다. 슬픔은 싫은 거지 나쁜 게 아닙니다. 슬픔은 이겨내는 거여야지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픔과 슬픔이 행복으로 가는 시작점이기 바랍니다.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야 그 다음 고픔이 일어납니다. 보고픔, 사랑하고픔, 살고픔 등등. 눈물 나게 사랑하고픈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최근에 저는 아픈 사람을 만나서, 슬픈 사람을 만나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참 슬펐습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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