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동포들은 눈물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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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동포들은 눈물을 믿지 않는다
  • 김제완
  • 승인 2004.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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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동포사회 탐방
IMF 두번 겪고 '독종'들만 살아남아
최근 유가상승으로 러시아 경기 급상승


90년대 러시아는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통제사회에서 자유주의로 급격히 전환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지난 10년은 한국보다도 변화가 심한 활극의 시대였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면 해방직후같은 혼란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아온 모스크바 거주 3천5백명의 한인들은 다들 스스로를 '독종'이라고 말한다. 어느 지역 동포들보다도 생존력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영화제목을 패러디해서 "모스크바동포들은 눈물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은 특히 97년11월의 한국의 IMF사태와 98년9월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을 연이어서 겪어냈다. 그래서 IMF를 두 번 겪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를 겪으며 교민의 숫자도 8천명에서 2천명으로 줄었다가 요즘 경기가 좋아지면서 인구가 늘고 있다.

특히 최근 유가가 나날이 최고치를 갱신하면서 모스크바 시내가 흥성거리는 듯하다. 2010년까지 GDP를 두배로 늘리겠다는 푸친대통령의 공약에 모스코비치들은 큰 기대를 안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 경제적 변동이 심한 곳에서 한국동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모스크바 거주 한인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 시내에 있는 아를르뇩 호텔 지하상가이다. 22층의 고층호텔 지하에는 적지 않은 규모의 카지노가 있어서 입장을 하려면 공항에서와 같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카지노 기계 사이를 지나서 지하에 있는 골목에 안내되다보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작은 자하 골목에 다다르면 그곳에 한국식당과 여행사들 간판이 늘어서 있는 골목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식당과 여행사들이 왜 이렇게 호텔의 지하상가 골목에 숨어 있는 것일까. 마치 숨어서 장사하는 격이다. 이런 업소가 이곳에만 30여개가 있다. 이중에는 식당 5개를 비롯해서 한국식품점 빵가게 까페 룸살롱 술집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한인상가가 자리잡은 것은 90년 수교직후부터이므로 모스크바 한인사회의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 이곳은 IMF 위기때도 상가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처럼 기이해 보이는 한인상가 모습에서 모스크바 동포사회의 핵심 키워드가 숨어 있다. 그것은 '안전'이다. 한인회가 잘 모이는 것이나 유학생들이 유학생회를 중심으로 잘 단합되는 것도 서로 연대하여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인 동포들중에는 늘 흰 와이셔츠에 정장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도 동네의 불량배들을 피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신라식당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한국식당으로 알려졌는데 이 식당은 보기 드물게 길가에 나있다. 그 이유가 있다. 모스크바 주재 몽고대사관의 아래층을 임대받아서 영업하기 때문이다. 대사관 건물이어서 국가에서 경비해주고 있다. 이런 경우외에는 마피아 때문에 길가에서 영업하기가 어렵다.

러시아는 외국인에게 혹독한 나라이다. 모스크바의 관문인 공항에서부터 황당한 일을 겪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공항 직원들의 불친절은 차치하더라도 관광객에까지 일종의 체류증을 발급하고 지참하지 않으면 경찰에 단속을 받는 시스템은 여간해서 이해하기 어렵다. 최소한 자유롭게 배낭여행을 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니다.

자동차 번호판도 자국인은 흰색 외교관은 붉은색인데 외국인에게는 노란색을 달도록해서 드러내놓고 차별을 하고 있다. 교통위반시에도 경찰은 외국인에게는 더 많은 뇌물을 요구한다.

이민제도가 없는 나라여서 국제결혼 외에는 영주권 받기도 어렵다. 이때문에 오랫동안 거주한 동포들도 일년에 두 번 리투아니아등과같은 러시아 인근국가에 나갔다가 새 비자를 받아서 들어와야 한다. 전에는 한번 나가서 일년치 비자를 받았는데 지금은 기간이 절반으로 줄어 두 번 발걸음을 해야 한다. 동포들은 러시아정부를 탓할 수도 없다면서 한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비자 받기는 여기보다 더 어렵지 않느냐고 말한다.

비자를 받고 체류하면서도 체류허가증 같은 것을 별도로 받아서 여권과 함께 들고 다녀야 한다. 여권을 일상중에 반드시 소지해야하기 때문에 다들 여권이 상하지 않도록 와이셔츠 윗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이와 관련해서 겨레일보 박종권 사장은 이런 우스개 말을 해준다. 공동묘지에서 유령 다섯이 산책을 나왔다. 그런데 그중 한 유령이 다른 유령에게 말했다. 이봐, 패스포트 가지고 나왔어? 그랬더니 다른 유령은 되돌아가서 비석을 뽑아서 어깨에 매고 다시 나왔다는 이야기다.

이같이 동포들의 자리잡기에 척박한 곳이지만 리스크가 많은 사회에서 기회도 많다는 것을 이곳동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식당 15개 여행사 7개 호텔 5개등이 기본적인 사업체가 들어섰다. 그리고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30명과 제조업을 하는 사람도 7명이 있다. 장학정 모스크바 한인회장은 앞으로 한인사회가 나가야할 분야로 제조업을 꼽으며 의류 앨범등 사업이 전망이 있다고 한다.

이외에 선교사들이 가족까지 150명, 상사주재원 가족까지 700여명, 엘지 삼성만 100명에 이른다. 세계4대공관중 하나이므로 러시아 대사관 직원도 다른 곳보다 많다. 보따리장사 가족포함 500명 유학생 700여명등이다. 이외에 프리랜서 기술헌터가 50여명있으며 기타 민박집도 여럿이 있다.

공항에서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오면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눈에 크게 띄는 것은 삼성 엘지 프로퍼갠더들이다. 시내 거리를 온통 도배해놓은 듯해서 오히려 시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을지 슬그머니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한국기업들이 모스크바를 잠재력이 높은 시장으로 보고 있다.

모스크바 시민들의 대졸초임이 5-600불에 불과해 값비싼 가전제품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들은 소비에트에서 러시아로 이전하면서 국가소유의 아파트를 거주자 명의로 바뀌어 다들 집을 소유하고 있다. 지금도 결혼하면 국가에서 아파트를 내어준다고 한다. 이외에 다차라는 교외의 별장도 가지고 있다. 월급은 적어도 생활은 궁핍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같은 시장 잠재력이 한국기업을 불러모으고 있다. 삼성 엘지만해도 한국에서 파견된 직원이 100명에 이른다. 한인들이 이같이 험한 곳에자리를 잡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진다. 장학정 한인회장은 리스크가 많은 곳에 기회도 더 많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한때는 돈을 긁어 모았다는 사람 찾기도 어렵지 않다. 100달러를 1만원 쓰듯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는 겨레일보 매일신보 우리신문등 새개의 동포신문이 있다. 그런데 이 신문들이 모두 일간지인 것도 특이하다. 가장 오래된 겨레일보는 10년전에 팩스신문부터 시작했다. 왜냐면 당시에도 시내전화요금이 무료여서 팩스요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뒤 종이신문도 A4크기의 일간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각신문 마다 약 3백부씩을 찍어서 매일 고려인 러시아 여인들이 배달을 한다. 월 20불인 신문의 구독비는 배달사원들이 인건비로 나눠 갖고 신문사는 광고비로 운영한다.

이외에 타블로이드 크기의 재러한인신문은 고려인신문으로 러시아어로 펴내며 1페이지만 한글 소식이 들어있다. 이 신문의 최발렌찐 편집장은 58세로 타스통신 기자 출신이다. 2만부를 발행해 모스크바뿐 아니라 인근 도시들에까지 배포한다. 이외에도 고려인 전문 주간지인 아리랑이 있다.

한인들과 고려인들과의 관계는 소원한 관계를 넘어서 일부분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교류 협력관계가 미약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도 없다고 한다. 특히 이번 행사중 갈라콘서트에 한인회에 티켓 500장중에서 30장만 보내와 반감을 일으켰다.

한인사회 정착 초기에는 한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고려인을 채용했으나 요즘은 차라리 러시아인을 쓰겠다는 사람도 많다. 고려인은 임금이 평등하지 않다고 불만이고 한인들은 고려인에게 맡겼다가 이들이 그만두면서 탈세등 회사 내 문제를 고발해서 피해를 본 사례가 있다며 불신감을 드러낸다. 이같은 현상은 중국에서도 조선족과 한인 사업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극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 설명 : 스푸트니크호텔 옥상의 아리랑식당에서 내려다본 모스크바 '강남'지역 전경. 왼쪽에 오락실의 갤러그처럼 보이는 건물이 모스크바대학이다. 가운데 큰 건물이 지하에 한인상가가 밀집해 잇는 아를르뇩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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