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그립 국가와 무슬림 형제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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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그립 국가와 무슬림 형제단 (4)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 연구소장
  • 승인 2018.10.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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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일주 중동아프리카 연구소장
알제리, 무슬림 형제단은 정권과 거리를 두고

알제리는 10월 3일자 신문에서 압둘 아지즈 부타플리까(아랍어 발음) 대통령이 알제리 의회를 해산시킬 것 같다고 전했다. 대다수 의원들이 하원(국가 국민의회; 제1실) 의장 사이드 부하자의 사퇴를 요구했으나 대통령의 해임지시 없이는 그가 사퇴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알제리에서 무슬림형제단은 1976년에 알무와히딘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됐고 1980년에 해체됐다. 알제리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구국 전선 당’과 같은 살라피 물결 다음으로 정치적 지위를 가졌다. 알제리 국민 대다수는 이슬람주의 정당에 투표를 해 ‘이슬람 구국 전선(구조를 위한 이슬람 전선)당’이 알제리 국회를 휩쓴 다음에 국방부 장관 칼리드 니자르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0년대 초 알제리에서 군사 사회주의 정권은 증가하는 이슬람주의의 반대에 맞닥뜨렸다. 그런데 1995년에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석유산업, 교육, 비즈니스, 건강, 무역 그룹들 사이에서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곧 무장 이슬람주의자들이었다. 가장 많이 위세를 떨치던 이슬람주의자는 64세 압바시 마디니였고 그가 1992년 감옥에 들어가자 전사들은 그의 보좌관 35세 알리 벨하지에게서 명령을 하달 받았다.

알제리는 1954~1962년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독립전쟁이 있은 후 프랑스 체제를 따라야 한다는 사람과 식민지 유산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1970년대 프랑스어를 버리고 아랍어와 이슬람을 받아들이자는 정부 캠페인이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아랍어 교육 방식은 잘 정비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슬람 구국 전선이 모집한 사람들은 사회적 하층 그룹이었다.

1988년 민중 봉기가 일으킨 알제리인들은 일자리, 음식과 집을 달라고 했고 이런 상황에서 통합된 이슬람주의 야권과 베르베르 인종 운동이 재빨리 그들의 지지 세력을 모았다. 그리고 독립 후 처음으로 다당제 선거이었던 1991년 1차 선거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될 상황에 이르자 이것을 막고자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들은 선거 결과를 취소했고 이것이 곧 알제리 내전의 도화선이 됐다. 군인들은 이슬람 구국전선이 의회의 2/3 의석을 얻으면 헌법을 개정해 이슬람주의 국가가 될 상황이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알제리에서 이슬람주의 운동이 큰 타격을 받았고 이들 무장 세력은 1994년 지하드를 했다.

1996~1997년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은 그들의 잦은 폭력 사용으로 시민들에게 인기를 잃어갔으나 소규모적인 폭력사태는 그 뒤로 이어졌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언론인들 70여 명을 살해했고 특히 외국인들도 100여 명 이상이 살해됐다.

아랍의 봄이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터지자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에서 권력을 차지했고 나중에 모로코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들 국가에서 무슬림형제단이 강한 리더십을 보이고 튀니지에서는 알나흐다 운동이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이 승리하자 알제리에서는 민주주의 국민 회합 당의 우야흐야와 민족 해방 전선(FLN)의 압둘아지즈 벨카뎀이 연합해 선거에서 단일 후보를 내기로 했다.

알제리 살라피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정부의 종교성과 한마음이 돼 살라피를 억압한다고 비난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정권이 알제리의 이슬람주의 운동의 두 그룹인 형제단과 살라피의 갈등을 유발하려고 살라피를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알제리의 살라피는 정치적 이슬람이 실패한 것을 기화로 알제리 청년들 속에 살라피를 확산시키려고 힘쓰고 있다.

살라피들은 청년들에게 살라피가 되는 것은 샤리아 학문(이슬람 율법학)의 훈련 코스를 받지 않아도 입회가 가능하다고 선전했다. 아직도 알제리의 살라피 일미(살라피 지하디는 외국인과 무슬림을 살해했으나 살라피 일미는 인명 살해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당 활동을 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므로 정치적 이슬람과 대조가 된다.

알제리의 무슬림 형제단의 리더 마흐푸즈 나흐나흐가 2003년 사망한 뒤에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가 없어서 ‘평화 사회 운동’이 나뉘어졌다. 알제리의 ‘평화 사회 운동(HMS)’은 1990년에 세워진 정치 개혁 운동인데 이들은 무슬림 형제단에 속한다. 이 정당은 처음에는 이슬람사회 운동이란 명칭을 가졌는데 이슬람 구국 전선의 확산을 막고자 이슬람, 아랍어, 이슬람 움마의 소속을 강조했다.

‘평화 사회 운동 당’이 1994년부터 2012년까지 정부 각료로 참여했지만 2012년 선거 이후 정부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정당의 반대세력들이 정권에 참여하지 말고 야권과 연대하자고 한 것이다.

2017년 알제리의 무슬림 형제단은 11년 만에 알제리 형제단이 통합하는 회의를 열었다. 2018년 5월 ‘평화 사회 운동’당의 제 7차 대회가 끝났는데 의장으로 압드 알라자끄 마끄리가 연임됐다. 이번 대회에서 당수이자 전 장관이었던 아부 자라 술따니가 마끄리와 경쟁에서 거부당했다. 술따니가 정권에 합류한 경험이 있어서 그는 그의 지지자들을 확보하려고 ‘충고하는 동참’에서 ‘비판하는 동참’으로 선거구호를 바꾸었으나 결국 마끄리 지지자들이 술따니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평화 사회 운동 당’은 지난 5년간 정부에 각료로 참여하지 않았다. 대통령 압둘 아지즈 부타플리까는 2016년 평화사회 운동당에게 두 장관직을 줄테니 내각에 참여해 달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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