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상태바
[기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 대련한국국제학교 11학년 김어진
  • 승인 2018.10.25 14: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 맞아 뤼순 지역 답사

▲ 대련한국국제학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답사단 (사진 대련한국국제학교)

대련한국국제학교에서는 109년 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인 10월 26일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학생 답사단을 만들어 뤼순 지역을 답사했다.

이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배경이 됐던 장소들을 돌아보고 안 의사 유해발굴을 시도했던 곳과 발굴예정지를 찾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며 대련한국국제학교 측은 이번 답사단 중 한 명이었던 11학년 김어진 군의 참여 소감을 보내왔다. 기고문 제목은 답사단 이름과 같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다. (편집자 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2018년 10월 21일 내가 살고 있는 중국 대련에서 근대사의 상처와 안중근 의사의 역사까지 가지고 있는 여순으로 대련한국국제학교 학생들과 답사를 떠났다.

여순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을 한 지역, 안 의사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장소인 여순 감옥이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또, 여순은 오랜 기간 일본군과 러시아 군이 주둔해 점령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에선 청, 러, 일 군대가 충돌한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여순 답사는 청과 일본이 충돌한 청일전쟁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만충묘에서 부터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1894년 11월 21일에 여순을 침입해 4일간 무려 2만 명을 학살했다.

그들은 죄증을 묻어버리기 위해 시체를 7일간 태운 후에 유골을 백옥산 동쪽기슭에 묻어버렸다. 이후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여순에서 물러갔고 전쟁 발발 2년 뒤 청나라 정부는 이곳에 “만충묘”라는 비석을 세우며 조의를 표했다.

만충묘 추모관에서 학살기간 중 강가에서 살해당한 민간인들의 모습을 그려 놓은 큰 사진과 그 당시 도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이 섞인 흙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일제의 잔인함을 깨닫게 됐다.

전시관을 통과하자 피해자들의 유골이 함께 매장된 만충묘가 나타났다. 2만명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일재의 잔혹함에 다시 한 번 치가 떨린다.

만충묘를 나와 청일전쟁 10년 후인 러일 전쟁의 역사가 묻혀져 있는 동계관산(东鸡冠山)으로 갔다. 당시 러시아 군은 일본군의 침입을 대비해 산 전체를 지하 요새화했다. 눈으로 살펴본 동계관산의 요새는 실로 대단했다.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1904년에 동계관산을 공격했다. 이 산을 포함한 여순에서 일본군 5만, 러시아군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계관산을 돌며 목격한 수많은 총탄의 흔적이 탐욕스런 제국주의의 야욕을 말없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오전에 청, 러, 일의 충돌의 역사 현장을 탑사한 후, 오후에 나를 비롯한 대련한국국제학교 학생 답사단은 본격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추정지를 찾아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합의된 안중근 의사 남북 공동 유해 발굴 사업은 2008년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이행됐다. 
 
2008년 당시의 발굴은 여순 감옥 마지막 교도소장의 딸의 사진에 기초해 진행됐다. 

그녀가 안중근 의사의 묘로 추정되는 곳 옆에서 찍은 사진을 한국 측에 제공해 남북 공동조사단은 가장 유사한 지형을 가진 곳을 찾아 발굴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안의사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답사단이 찾은 여순 감옥 뒤의 발굴 현장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1차 발굴 시도 장소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아파트 촌이었다. 남북한 공동발굴 시도도 역사인데 1차 발굴지라는 표지석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1차 발굴 시도지를 떠나 2차 발굴 예상지로 향했다. 여순 감옥 벽을 따라 걸으며 동행한 대련한국국제학교 역사 선생님의 설명으로 감옥벽을 자세히 보자 지금은 막혀있는 시구문(시체가 나가는 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차 발굴 시도지는 감옥의 시구문에서 왼쪽으로 나가게 돼 있지만 2차 발굴 예상지는 시구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연결돼 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이 시구문으로 통해 나왔다고 한다.

감옥의 측면을 단순히 벽이라고만 여겨 쉽게 지나칠 수 있었지만 선생님의 설명으로 막혀진 시구문마저도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왔다. 대수롭지 않은 이런 벽에서 과거와 현재가 연결돼 있는 말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 뤼순감옥구묘지 (사진 대련한국국제학교)

답사단은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이자 2차 발굴 예상지인 뤼순감옥구지묘지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 뒤에 위치한 이 묘지는 지금도 묘지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아파트 단지 사이의 길을 따라 가다가 낮은 야산에 들어섰다. 입구엔 묘지를 연상케 하는 많은 나무 조형물들이 묘지임을 짐작케 했다.

이 묘지는 방치됐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관리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이 곳에 묻혀있다는 확증은 없지만 적어도 현재 유력하게 추정되는 매장지 인데, 아직 우리나라가 그를 존중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안타까움이 만충묘에 영실불망(永失不忘)이라고 크게 써 놓고 오래오래 기억하자는 중국인들의 태도와 왠지 모르게 대조돼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순감옥구지묘지라는 묘비석에 서서 공동묘지 전체를 살펴봤다. 낮은 야산으로 나무과 잡풀들로 가득차 있었다. 매장된 수 천구의 유해 중 안의사의 유해가 발굴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봤다. 기술의 발전으로 유해 발굴 작업은 지하의 관을 스캔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안 의사가 사망한 후에 관에 눕혀진 방식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돼 있어 매장지만 분명하다면 관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고 한다. 안의사의 시신은 원통에 담겨져 매장되는 여느 감옥시체와 달리 네모난 관에 반듯하게 눕혀져 매장됐다고 기록됐다.

또한 천주교 신자라 십자가가 관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이런 단서들을 가지고 이 공동묘지를 스캔을 하고 유사한 형태의 유골이 나오면 현재 확보된 유족들의 DNA와 비교해 유해임을 확정한다고 한다.

내년 3월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남북한 공동발굴 작업이 이곳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한 동네의 낮은 야산이지만 내년 3월 이후에 이곳은 동북아시아 뉴스의 집중을 받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 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 동안의 노력과 오늘 하루를 정리해 봤다. 교과서에서 배운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 행위에서 시작해서, 순국일 3월 26일에 여순감옥을 방문했고, 교내 옥중자서전 독후감쓰기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생각과 삶을 탐구했고, 방과후 수업에 참가하면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완성해 봤고, 그리고 오늘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추정지를 답사했다.

역사 선생님께서 말씀대로 ‘관심’이 없었더라면, 이 모든 일과 활동들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관심으로 시작돼 한 개인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오늘 여순감옥구지묘지를 답사하고 나서 더이상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을 남들이 해주기를 바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나부터 관심을 가지고 그 관심을 키워가면서, 나아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함께 이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대련한국국제학교 11학년 김어진


주요기사
이슈포토